피터 브룩(Peter Brook) 과 그의 작품들

피터 브룩(Peter Brook) 과 그의 작품들


나유신 옮김


Introduction


피터 브룩은 그의 책 『빈 공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있다. 미국의 연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메이어홀드 같은 사람이 나타나야 하는데 왜냐하면 삶을 자연주의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미국인들 삶의 근원적 동인을 표현하기에는 더 이상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브룩이 극계에 나타났을 때 영국 연극계는 마침내 영국판 메이어홀드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브룩의 천재성은 러시아의 거장에게 매우 익숙해져있던 비자연주의적 연극세계의 가능성을 열었다. 사실상 브룩과 메이어홀드는 이 시대의 실험주의자-연출자의 뛰어난 예일 것이다. 실험주의자-연출가, 즉 과학자-예술가는 무대를 실험실로 사용해서 선택된 연극적 재료들의 결합이 최종결과에 어떤 화학적 효과를 미칠 것인가를 탐구한다. 그 두 사람은 계속해서 연구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본질적으로 밝힐 수 없는 것―연극은 무엇이고 연극의 본래적 특성은 무엇이며 그것은 왜 존재하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초년시절


피터 브룩(Peter Stephen Paul Brook)은 러시아계로서 1925년 런던에서 시몬 브룩(Simon Brook)과 이다 브룩(Ida Brook) 사이에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과학자였기 때문에 그의 연구적인 기질은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영국과 스위스에서 학교를 마치고 브룩은 옥스포드 대학에 다녔다. 거기서 그는 그가 나이어린 천재라는 것을 증명하기 시작했다. 1943년 학위를 받기 1년전(19세) 브룩은 자신의 극단 「Torch」 를 만들고 아마추어 극단과 함께 첫 번째 작품인 파우스트 박사를 올렸다. 그 당시 그의 목표는 영화감독이 되는 것이었으나―그는 1944년에 로렌스 스턴의 소설 『감상적 여행』을 각색한 그의 첫번째 영화를 만들었다―그의 일련의 경력은 그가 만든 영화작품이 중요성하기는 해도 그의 광범위한 연극활동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부차적인 활동이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1945년쯤 그는 런던에 있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Chanticleer Theatre」 에서 일하면서도 콕도의 극을 공연함으로써 주목을 받았다.


브룩은 런던의 「Q」 극단에서 루돌프 비지어의의 제작에 참여했고 ENSA(전국연예인서비스협회) 순회공연 때는 버나드 쇼의 『피그말리온』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는 중 그는 배리 존슨 경이 소유한 유명한 「버밍햄 레퍼토리 극단」 에서 연출하도록 초대되었다. 그는 그 극단에서 『인간과 초인간』을 공연하였는데 거기서 처음으로 폴 스코필드(Paul Scofield)와 일하게 되었다. 결국 스코필드는 브룩의 작품에서 어떤 다른 주연배우보다 많이 출연하게 되었다. 영국 배우들 중 길거드 경만이 스코필드만큼 브룩의 작업에 자주 참여했다. 1945년이 저물기 전에 스코필드는 브룩이 셰익스피어의 극과 입센의 극를 올릴 때 출연하였다.


스코필드는 나중에 회상하기를 그 20살 된 감독은 “작품을 한번 읽고도 그 작품에 대한 개념을 세우곤 했는데 「버밍햄 레퍼토리 극단」에 있는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좀 건방져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어린 사람이 그런 통찰력을 갖다니 말이다.” 그러나 브룩의 천재성은 곧 확실해졌고 그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파악이 완전히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브룩의 관심은 연기보다는 시각적인 분위기를 나타내는 효과에 더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코필드는 브룩이 끼친 영향을 회상하면서, 브룩은 그와 다른 배우들이 갖고 있는 자기도취를 흔들어 놓았고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충격이었다고 회고한다.


1946년 브룩은 「스트렛포드 온 에이븐」이라는 셰익스피어 기념극단에서 연출을 맡기 시작했다. 1947년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했다. 두 작품 모두 비전통적인 작품이었다. 전자는 와토에게 영향받은 사랑스러운 장식으로 기억된다. 브룩은 연극의 재료들이 허락하는 한에서 그 장식을 현대의 관객들을 위해 작품을 호소력있고 이지적으로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설명하기를 낡고 장식없이 굽이치는 새틴이 쫙 펼쳐져 있는 와토의 의상스타일은 이 연극의 기저를 이루는 달콤한 슬픔의 분위기를 시각적인 상관관계에서 이상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그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이와 유사하게 공주의 궁정장면에서 원본에는 없는 조용한 인물을 첨가했다. 그 인물은 회칠한 얼굴을 하고 하얀 옷을 입은 어릿광대이다. 그는 끝까지 이 장면의 분위기인 외롭고 풀죽은 분위기의 상징으로 나온다. 옅은 파스텔조로 보여지는 여름 저녁 장면에서는 불안한 이미지의 검은 복장을 한 메르케이드가 나왔을 때 심오한 이미지가 연출되었다. 그의 우울한 기질은 죽음이 닥쳤을때 현실이 끼어들어오는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브룩은 줄리엣과 프라이어 로렌스 사이의 장면을 없애버리고 몬태규가와 캐플릿가의 화해장면은 삭제시키는 등 원작에서 자유롭다. 브룩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정신의 ‘힘참’을 견지하기 위해서 연기, 무대장치, 음악에서 모든 감상적 요소의 흔적을 배제하고 대신에 각 요소들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강조했다. 덧붙여 주연배우를 뽑는 문제에서 너무 젊은 사람을 캐스팅함으로써 소란이 여러 번 일어나기도 했다―줄리엣 역에 18살난 대픈 슬래터(Daphen Slater)를 뽑았다.


한편 브룩은 1946년에 런던에서 알렉 기네스가 각색한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사르트르의 『악순환(Vicious Circle)』을 공연함으로써 주목받고 있었다. 다음 해에도 사르트르의 『그림자 없는 남자』와 『존경할 만한 창녀』를 공연하였다. 1948년에 코벤트 가든의 로얄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2개의 오페라에 브룩이 고용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후로도 많은 중요한 오페라를 올렸다. 그러나 그는 1949년에 정통 드라마로 돌아왔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하워드 리차드슨과 윌리암 버니의 이국 민속연극 『달의 어두움』을 다소 경험이 일천한 젊은 배우를 기용하여 그 에너지와 열정을 폭발시켜냄으로써 웨스트엔드의 명성을 얻었던 것이다. 비평가 케네스 타이넌(Kenneth Tynan)은 인물의 등장을 다루는 브룩의 “놀랍도록 창조적인 방법”을 회상하면서 말하기를 이 연극에서 요술소녀가 등장할때 “프로시니엄으로부터 뒤쪽으로 기대도록 하여 말하는 동안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달의 어두움』은 다른 오페라 작품으로 계속되나 1950년에는 연극에만 전념하여 장 아누이의 『달무리』, 스트렛포드에서는 『이에는 이』와 앙드레 루신의 『작은 오두막』을 제작하였다.



『이에는 이』 Measure for Measure


길거드가 앵글로를 연기한 『이에는 이』는 훌륭한 업적이었으며 지금까지도 현대에서 가장 뛰어난 『이에는 이』 공연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에는 이』는 개념상 놀라우리만치 수직적이다. 타이넌은 브룩이 오직 한 가지 소설적 장치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았다:


폼페이는 너무나 불결한 빈의 감옥에서 불구와 기형의 섬뜩한 행진을 소개한다. 드디어 항아리를 박살내었던 와일드 해프캔이 등장한다: 그는 아주 나이가 들었고 넝마가 된 코트를 걸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고개를 이쪽 저쪽으로 휙휙 돌리면서 맨발의 뒤꿈치로 곧추서서 엄지발가락을 세우고 꼬챙이처럼 딱딱하게 걷는다. 감옥장면의 모든 유령같은 이 희극은 굉장히 재미있는 발상물에 요약되어 있다.


브룩이 휴지를 대담하게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것은 작품을 더욱 흥미롭게 만들었다. 타이넌은 『이에는 이』의 2막을 지적한다. 2막은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 불가능한 일들의 긴 장면이기 때문에 보통은 그 과정이 벗겨지기 전에 빠른 속도로 처리해 버린다. 그러나 브룩은 매우 신중히 그 장면을 다루기로 해서 이자벨라로 하여금 앵글로의 목숨을 애원할 것을 결정하기 전에 35초의 완전한 휴지를 갖도록 한다. 이것은 너무나 긴장된 분위기를 만들어서 극장 안 사람들의 모든 심장이 쿵쿵 뛰도록 만들 정도이다. 디자이너로서의 브룩의 재능은 여기서도 분명히 드러났다: 그는 비엔나의 시대정신을 엘리자베스 시대의 다시말하면 현대세계의 어두운 이면으로 보고 보스크와 브뤼겔로부터 끌어낸 아이디어를 사용해 세트와 무대를 제작했다. 그가 디자인에 불어넣은 형식주의적 분위기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브룩이 전체적인 장면의 개념을 기술적으로 잘 다루었다는 것이다. 그는 하나의 세트를 디자인했는데 그 세트는 장면의 플러그나 다른 디테일들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면서 요구되는 모든 변화를 현장에서 할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그 세트는 날아갈 듯 치솟은 두 열의 아치로 되어 있었는데 중앙무대로부터 솟아서 양쪽 날개부대로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실외장면은 아치 사이로 공중에 매달린 무대가 아치 사이로 보여졌다. 그리고나서 두 개의 아치에 있는 다른 플러그들은 실내의 장면이 어디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더욱 기념비적인 특징은 심오한 장면들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된 양쪽 아랫무대에 위치한 무거운 뒷문으로서 그것들은 무대 전체 공간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보다 길이가 짧은 장면들에서는 장면이 일어나는 부분을 제외하고 무대의 다른 부분들은 사장시킴으로써 그 장면을 더욱 빛나게 하였다.


1950년대


브룩은 1950년대에 매우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브뤼셀, 파리, 런던, 뉴욕에서 연출을 맡았다. 그가 국제적으로 활동하면서 첫번째로 연출한 작품은 불어로 공연한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1951년 브뤼셀에서였다: 그 해 그는 런던에 다시 돌아와서 존 휘팅의 『겨울 이야기』(길거드와 함께)를 무대에 올렸고 역시 그 해에 아누이의 ????를 공연했다. 영화제작을 위해 1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1953년에 공연이 잘 안되는 토마스 오트웨이의 왕정복고시대의 비극인 ????(길거드와 스코필드가 주역을 맡았다)를 제작했고 뉴욕에서는 『작은 오두막』을 다른 매체에서 영상화시킨 것만큼 훌륭하게 제작했다. 크리스토퍼 프라이의 ????은 브룩이 1954년에 올린 첫 작품이었다. 그 한해는 아더 막레이의 ????으로 장식되었다. 브로드웨이에서는 트루먼 캐포트와 해럴드 알렌작, 펄 베일리 주연의 특이한 뮤지컬인 ????을 공연했다. 1955년은 아누이와 셰익스피어의 차례였다. 브룩은 아누이의 『종달새』와 셰익스피어의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를 스트랫포드에서(나중엔 런던에서) 공연했고 『햄릿』(왕자역에 스코필드)은 웨스트 엔드에서 공연했다. 햄릿도 러시아까지 순회공연했다.


1956년에는 그레이엄 그린의 『권력과 영광』(목사 역에 스코필드)을 각색한 작품으로 시작했다. 이후에도 브룩은 엘리엇의 ???, 아더 밀러의 『다리에서 본 풍경』, 테네시 윌리암스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를 불어로 번역한 작품을 파리에서 공연하느라 내내 바빴다. 1957년 브룩은 스트랫포드에서 길거드 주연의 『템페스트』를 공연하였는데 이것은 이들 세 고전작품 중 브룩이 시도한 첫번째 작품이 되었다. 이 공연은 런던으로 왔다. 1957년에 그의 다양한 계획 중 하나는 파리의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을 포함한 『티투스 안드로니쿠스』의 유럽순회 공연이었다. 다음 해에 브룩은 파리에서 『다리에서 본 풍경』의 불어공연을 했고 브로드웨이에서는 스위스 작가 뒤렌마트의 『방문』을 알프레드 룬트와 린 폰테인 주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코미디 뮤지컬로 돌아와서는 대중적 프랑스 쇼인 ???를 다시 런던에서 영어로 공연하였다. 이 10년간 작업은 1959년 브로드웨이에서 아누이의 ???을 렉스 해리슨과 나타샤 패리 주연으로 공연한 것으로 대미가 장식되었다. 패리는 1951년 브룩과 결혼했고 그녀는 어느날 그의 연극작업에서 큰 의지가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특기할만한 공연과 제작은 그의 레퍼토리의 중요성에서 그리고 국제적 활동영역의 측면에서 브룩을 세계에서 가장 진지한 연출가 중 하나로 만들어 주었다. 이러한 많은 업적 중 많은 부분은 디자이너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그의 재능에 힘입은 바 크다.


길거드와 스코필드는 서로 잘 맞는 주역들이었다. 그 작품에서 브룩은 어마어마한 힘의 비극적 강도를 얻기 위해 그의 환상적인 창의력을 억제했었다. 브룩은 주 텍스트를 수술하고 자르고 위치를 뒤바꾸어 놓고 압축시키고 종국에는 배우들에게 인물과 상황의 생생한 감정을 새롭게 바꾸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로렌스 올리비에와 비비안 리가 주연한 현재 널리 알려진 『티투스 안드로니쿠스』를 공연하기 위해 브룩은 무대세트와 의상을 디자인했을 뿐 아니라 무지끄 콩끄레떼 형식의 놀라운 음악을 작곡하기도 했다. 이 냉랭한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작품의 제의적인 핵심을 드러내었고 한층 괴괴한 장면에서는 관객이 소리를 죽이며 웃지 못하게 하기 위해 원작을 수정하면서 압도하는 효과를 주는 작품을 만드려 애썼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그가 그랜드 기뇰(Grand Guignol) 연출법에 의지할까 우려하는 것과는 달리 관객들을 당황스럽게 놀래키는 것을 피했다. 이보 브라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방법은 유형의 강을 없애는 것이지 찌르고 죽이는 판을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선홍색 리본으로 상처를 형상화한다. 난도질 당한 라비니아도 여전히 봐줄만 했다. 수술을 받아 고생하고 정신적으로 시련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다운 모습의 비비안 리가 그 역을 연기했기 때문이었다.


『티투스』는 1950년대 셰익스피어의 공연 중 그의 주요한 성과 중 하나였다. 이 작품으로 런던 시즌과 유럽순회 공연 중에 국제적인 갈채를 받았다.


『방문』에서 초기 유럽식의 극단적 연극화를 지양하고 원작에서 요구되어지는 것처럼 완전히 형식화시키지 않고 무대 세트와 연기를 단순하게 함으로써 더 정교하고 더 많은 메시지를 담아 상상력을 자극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뉴욕타임지의 브룩 엣킨슨은 브룩의 공연에 의해 주목받았다. 특히 마을사람들이 안톤 스킬을 죽이려고 몰려갈 때 도시에서 만나는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그는 다음을 인상깊게 보았다.


그 사람의 무감각한 얼굴에 떠오르는 공동의 결정이 주는 조용한 무게, 상대편의 눈에 안 띄는 붕괴, 그 싸움을 보기 위해 질서있게 모여있는 동네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질질 끌리는 발걸음과 무감각한 범죄광경을 당황스럽게 그려내는 것. 이러한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는 세부묘사 속에서 브룩은 대본을 활용하지 않고도 대본이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전달한다. 그의 기호/취미는 그의 기술만큼이나 나무랄 데가 없다.


브룩은 그가 1960년에 파리에서 공연한 장 주네의 『발코니』가 그의 전적에서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그 작품을 1960년에 순수 표현주의적 연극으로 이행하기 전 그의 마지막 “환영주의자”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브룩이 영국 아방가르드 연극의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명성을 얻게 되고 그의 작업에 있어 정점에 도달하게 된 것이 바로 이 10년간이었다. 즉흥적인 공동제작을 선호하는 그의 기호는 이제 그의 작품에서 하나의 원칙이 되었다.


1960년대: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1960년에 브룩, 미카엘 세인트 데니스, 피터 홀로 이루어진 삼인조는 지금은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RSC)로 개명한 「스트랫포드에 있는 구 셰익스피어 기념극장」을 경영하도록 위촉받았다. 그들의 목표는 현대 관객들의 요구에 대응하도록 셰익스피어 작품을 현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극단과 더불어 런던 컴퍼니가 스트랫포드에 생겨났다. 실험적 작업을 하는 RSC는 런던 컴퍼니가 셰익스피어를 무대에 올리는 아이디어를 불어넣었을 것이다. 브룩은 이런 흐름 아래서 제공받은 실험주의적 기회를 잘 활용하려 했다.


1960년대는 브룩에게는 특기할 만한 시대였다: 전체적 작품수는 줄었으나 불멸의 명작의 상대적 비율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1926년 폴 스코필드는 RSC와 함께 브룩 연출 하에 명작 『리어왕』을 연기했는데 그것은 그의 마지막 주연연기가 되었다. 그러나 거너릴을 연기했던 이렌느 월스는 그때가 브룩과 처음 작업한 것이었다. 그녀는 그의 가장 까다로운 몇몇 작품에서 믿음직스러운 대기배우가 되었다. 1963년 브룩의 첫 작품은 뒤렌마트의 『물리학자』(월스와 함께)였다. 그해 두 번째 작품은 스트랫포드에서 『템페스트』를 공연했고 옥스포드에서는 『스코비 프릴트의 모험』이라는 뮤지컬, 파리에서는 존 아든의 『머스그레이브 상사의 춤』의 불어 공연과 롤프 호흐후쓰의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기록극 『대리인』의 공연 그리고 『리어왕』의 국립극장 순회공연을 했다. 1964년에는 『리어왕』의 동유럽과 미국 순회공연과는 별도로―브룩은 인구에 회자된 잔혹연극시기의 작업에 몰두하여 주네의 『스크린』, 피터 바이스의 『마라/사드』를 훌륭하게 공연했다. 다음 해에는 ‘대영제국의 사령관’이라는 작위를 수여받는 것으로 시작하여(데이비드 존스와 함께) 바이스의 널리 읽힌 대학살 드라마인 『조사』를 관장했다. 그러나 그는 뉴욕의 오프닝을 위해 『마라/사드』를 준비할 때인 1966년이 되서야 비로소 작품 전체를 관할할 수 있었다. 같은 해 그는 베트남에 연루된 미국에 관한 작품인 공동저작의 『US』를 연출하였다. 그러나 관객들은 1968년까지 국립극장에서 길거드와 월스가 공연한 경이적인 작품 세네카의 『외디푸스』를 볼 때까지 그의 후속작을 보지 못했다. 또한 그 해 그는 파리에서 2년 후 형성될 극단의 시초인 국제적 그룹과 함께 일했다. 브룩의 세 번째 시도인 『템페스트』(런던의 라운드 하우스에서 공연)는 부분적으로 이 그룹으로부터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 60년대 말(사람들의 관점에 따르면 혹은 70년대 초) RSC를 위해 『한여름밤의 꿈』을 혁신적으로 해석했으며 그 결과로 그는 파리에 연극연구를 위한 국제센터를 설립했다. 이러한 총체적 작업 안에서 연극의 가능성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실험되었고 관객과 배우 간의 애증 관계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배우들의 예술에 있어 새로운 계층이 보여졌다. 모든 것이 비판적으로 잘 수용되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가 브룩식의 풍경에서 새롭고도 평범치 않은 지형을 표현했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아랫쪽에 묘사되어 있다.


『리어왕』 King Lear


연출가이자 디자이너로서 브룩은 이 세계에 대한 그의 시각을 거친 시각적 은유로 표현하는데 드러나보이는 장면의 요소는 오랜 세월 동안 닳아서 녹이 슬고 부식되어진 것으로 나타난다. 의상을 연구하는데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의상은 어느 특정 시대의 것으로 보여지는 것을 지양했으나 기독교 이전의 미개한 시대와 고도로 발달한 시대인 르네상스 사이의 어느 시대임을 말해주고 있다. 모든 의상은 매우 단순화되었고 닳아 빠진 것처럼 보였으며 장식이 거의 없었다. 스코필드가 연기한 리어는 황량하게 불이 밝혀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불길한 환경 속에 존재해 있다. 그러한 환경은 사용된 연기 스타일이 느린 동작과 건조함, 혼자 떠드는 신랄함과 잘 매치가 된다.


연기와 무대화에서 보여지는 연기와 인물에 대한 냉정하고도 엄격한 논평은 브룩이 베를리너 앙상블에서 브레히트 스타일과 친숙했던 영향이었다. 관객들로 하여금 사건들을 사심없이 판단토록 하기 위해, 관객이 보고 있는 것을 이해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의 구체적 예는 글로스터가 장님이 되는 장면에서 보여진다. 브룩은 관객들이 박수를 쳐서 막을 끝내기 전에 모든 조명을 다 밝힌 상태로 두어 관객에게 그 장면에 대한 인상을 남기려고 했다. 그 공연을 본 관객 중 그 연극에서 흔히 느끼게 되는 연민이나 슬픔의 감흥을 느낀 관객은 거의 없는 것처럼 보인다.


브룩은 썰렁한 감정이 개입되지 않는 접근방법을 고수하면서 리어왕에 대해서는 더 연민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즉 리건과 거너릴로 하여금 아버지에 대한 그들의 태도가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리어는 너무 거만해서 자식들의 독사의 이빨에 물린 것도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브룩의 실존주의적 해석은 감정을 이끌어낼 만한 것은 무엇이든 조심스럽게 삭제했다. 제임스 H. 클레이와 데니얼 크렘페이는 설명하기를 전쟁장면이 이 작품 중에서 유일하게 가장 특징적이며 연출의 창의력을 선명하게 남기고 있다. 장님이 된 글로스터는 벽이 갈라진 빈 모르타르 세트의 가운데 동그마니 혼자서 무릎을 꿇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응시하면서 땅에 묻혀 으깨질 것을 기다리고 있다. 마치 우리 바로 옆에서 나는 소리인 양 전쟁소리가 보이지 않은 채 점점 크게 일어나 우리들과 우리의 분신인 글로스터를 덮어버린다. 그것은 무시무시하게 용솟음치는 포효하는 바다이다: 불쾌한 음향의 소용돌이 즉 냉정한 괴수처럼 악의 파도는 무대 위에 있는 한 점 인간을 압도하고 따로 떨어진 채 홀로 그 인간을 지켜보고 있는 수백명의 우리를 엄습한다.


잔혹연극 워크숍


1964년에 브룩과 미국으로 국적을 바꾼 비평가 겸 연출가마로비츠는 RSC 후원으로 실험적인 런던 워크샵을 창설하는 데 힘이 되었다. 프랑스의 이론가 앙토냉 아르또의 사상이 잔혹연극 워크샵에 연감을 주었다. 그래서 이름도 아르또의 유명한 에세이를 본따 지었다. 이 워크샵에서 브룩은 그의 테크닉 중에서 매우 독특한 역할을 담당해왔던 배우들과 작업하는 협동적 방법의 기반을 마련했다. 전통적 언어의 한계에 대한 탐구와 비언어적 형태의 극적 표현의 가능성에 대한 천착 역시 이 워크샵에서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석달 동안의 격렬한 작업이었고 공연의 준비를 위해 즉흥연기의 훙련은 일주일에 평균 45시간에 달했다. 브룩은 그가 ‘죽은 연극’이라고 부르는 상투적인 경박함을 피하기 위해 우리 시대와 문화에서 진리라고 인식되어질 수 있는 제의를 바탕으로 한 성스런 연극의 요소를 발견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충격의 상실(그는 현대 무대언어에서 이런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이 새로 발견된 寫像주의적 방법에 의해 개선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했다.


연극은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작가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말로 된 언어 외에 다른 언어를 사용함으로 해서 말에서 보통 발견할 수 있는 이미지를 대체하기 위한 공연제작에서 사용할 수 있는 다른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가? 연기라는 언어, 소리라는 언어―움직임의 일부로서의, 거짓말으로서의, 패러디로서의 잡동사니같은 말, 모순되는 말, 충격이나 울음으로서의 말이라는 언어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잔혹연극을 연구하는데 깔려 있었다. 브룩이 앞으로 발전하리라는 것은 워크샵기간 동안 충분히 예상되어졌다. 마로비츠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조금씩 조금씩 목소리라는 알파벳의 문법적 복합체 이상의 소리를 낼 수 있고 자유롭게 풀어진 신체는 이차적인 것에 머무르지 않고 심리학적 암시 이상의 것 그리고 사회적 행동주의에서 말하는 원숭이처럼 모방하는 것 이상의 언어를 말하기 시작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소리와 동작은 느낌과 생각을 의사소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결과는 「LAMDA」(London Academy of Dramatic Art) 극단과 함께 8개의 좌석을 가진 동마 리허설 룸에서 5주 동안 발표되었다. 자주 바뀌기도 하는 기본 프로그램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번째는 폴 에이블맨이 스케치한 한쌍의 넌센스 스케치가 있고: 아르또의 초현실주의 소품 『Spurt of Blood』를 처음에는 음향의 소리로만 연기하고 나중엔 원래대로 말로 연기하는 것이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이야기를 마임으로 만든 것: 브룩이 창작한 한쌍의 연극적 꼴라쥬 『공중 목욕탕』과 『단두대』, 전자는 크리스틴 킬러의 콜걸 스캔들(나이 어린 글랜다 잭슨이 킬러 역을 눈부시게 해냈다)에 근거한 것이다: 주네의 『스크린』으로부터 몇장면: 마임 『분석』: 그리고 존 아든의 단편 『Ars Longa, Vita Brevis』: 두 번째 부분은 마로비츠의 『햄릿』을 가지고 만든 특이한 20분짜리 꼴라쥬이다. 거기에서 대본은 찢겨져서 조각난 후 다시 배열하여 뒤죽박죽이 되게 한다. 거기에 소위 그날 저녁의 자유로운 부분이 들어가 있는데 하나는 마로비츠가 지휘하는 즉흥연극이고 또 하나는 “스페셜”로서 즉 그 부분에서 장면의 리허설에서의 그날 저녁의 목적에 대한 공개토론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그 레슨에 더하여 브룩은 무대경험의 성질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고 젊은 배우들과의 집중적 즉흥작업은 극단을 끈끈한 집단으로 묶어주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또한 완전한 작품으로 축적되지 못했던 장기적인 창의적 계획의 가치를 발견했다.


이 실험적 기간으로부터 브룩의 다음 계획인 마로비츠와 공동으로 『스크린』을(돈마 리허설 룸에서) 공연하는 계획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스크린』에서는 매우 긴장된 의식주의와 연극같은 상황 속에서 알제리아 전쟁을 묘사하고 있다: 주네가 갖고 있는 아르또와 미학적 연계는 브룩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다. 브룩은 아마도 무대에 올릴 수 없을 것 같은 상상에서 조금씩 벗겨나가는 방법으로 서사적 부분을 다중 장면으로 보여주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애썼다: 살리 제이콥스의 세트는 기본적으로 롤러에 장착된 하얀 색의 큰 스크린으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그 세트는 아랍사람 같은 차림의 수사옷을 입은 무대담당에 의해 음직여진다. 이것은 잔혹연극 기간 동안 했던 연습들로부터 나온 장면의 부조화를 위한 것이다. 데이빗 윌리엄스는 이런 훈련 중의 하나를 설명하는데 그 훈련에서는 배우들이 즉흥적인 “액션” 페인팅에서 그들의 느낌을 페인트와 분필로 그림으로써 표현한다.


과수원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그 “아랍인들이 스크린에 미친 듯이 불꽃을 튀기게 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불꽃이 타는 소리를 내고 동시에 손에 밝은 오렌지색 종이조각을 들고 구기고 바스락거린다. 다른 장면에서는 폭력의 이미지인 할복, 강간, 살인 그리고 두려움의 표현이 빠르게 쏟아져서 스크린의 전체 표면이 막의 낙서로 뒤덮인다.”: 죽음이 난무하는 공포의 카탈로그.


잔혹연극 워크샵에서처럼 『스크린』은 소위 최종결과의 성공때문보다는 그 과정 과정에서 계속해 탐구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었고 장면들에는 훌륭한 독창성과 힘이 들어가 있다.


『마라/사드』 Marat/Sade


1964년 브룩은 세계의 주요감독 중 하나라는 그의 명성을 확실하게 굳혔다. 왜냐하면 이 해는 그의 런던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이 피터 바이스의 『The Persecution and assasination of Jean Paul Marat as performed by the Inmates of the Asylum of Charenton under the Direction of the Marquis de Sade』 때문이다. 여기서 브룩은 그동안 그가 기울였던 노력으로부터 결실을 보게 된다. 『리어왕』과 브레히트와 아르또라는 너무나도 다른 스타일을 혼합해 냈던 잔혹연극 훈련 덕분이었다. 브룩의 천재성은 브레히트의 객관적 연극이 주는 소외효과와 아르또의 주관적 접근이 주는 감정의 회오리 바람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냈고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 작품을 고든 크레이그의 『Moscow Hamlet』, 막스 라인하르트의 『기적』, 마이어홀드의 『The Inspecter General』, 박탕코프의 『투란도트』 그리고 그랜스빌 바커의 『한여름밤의 꿈』(브룩 연출의 『한여름밤의 꿈』은 흔히 이러한 거장의 작품들과 함께 거론된다)와 나란히 현대 연극역사의 하이라이트로 기억한다. 브룩은 『마라/사드』에는 엘리자베스 시대의 드라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비슷한 흥분, 경험과 시가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브룩은 이 연극의 스타일이 브레히트적이면서 아르또적인 것의 혼합이라고 생각했고 이 둘이 갈등관계에 있다고 생각치 않았다.


나는 (그가 쓰기를) 삶처럼 연극도 인상과 판단의 이어진 갈등으로 이뤄져 있다고 생각한다―환상과 비환상이 힘들게 공존하고 그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마라/사드』는 턱을 고이고 있는 관객을 깨게 하고 얼음물을 끼얹고는 그에게 일어났던 일이 무엇이었는지를 이성적으로 생각토록 하고 그 다음엔 그를 발로 차고서 그의 감극들을 다시 돌려준다.


그 연극 전체의 제목이 암시하듯 『마라/사드』는 한 정신병자 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이 동료 수감자 사드의 감독으로 공연한 연극(1808년에)에 관한 작품이다(브룩에게는 패트릭 마기가 연출한 것이 모델이 되었다). 정신병자가 혁명적인 마라(런던에서는 클라이브 르빌이 그리고 미국에서는 이안 리차드슨이 연기)를 연기한다. 그는 심각한 피부병 때문에 욕조 안에 있다. 여기서 아무리 피를 흘리더라도 전체주의적 통제는 필요한 것이냐에 관해 추상적 철학적 토론에 대한 근거가 제시된다. 논쟁의 승자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 광장한 논란을 일으켰으나(마르크스주의 작가들은 마라에게 손을 들었다) 그 작품과 공연은 정치적으로 양면적이었고 그것의 연극적 기회주의적 색채가 너무 강하여 각계의 비평가들은 그 작품이 회피적이며 궤변적이라고 생각했다.


배우들은 극중극 형식을 띤 그 작품에서 놀랍도록 사실주의적 방법으로 다양한 수준의 정신병을 연기했다(브룩은 정신과 의사인 그의 형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대본의 그 연극적 쿠데타에 대해 너무나 광범위하게 허용했기 때문에 리허설 중에 그들은 즉흥적으로 연기했다. 마가렛 크로이든에 따르면 바이스의 텍스트에서는 “모든 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교체될 수 있었다. 머리카락은 채찍, 칼, 성기, 욕조, 영구차가 될 수도 있었다.” 브룩은 상징적 연기를 창조해 내는데 천재성을 발휘하여 다음과 같은 장면을 고안해 냈다. 앞무대에서는 피트로 정신병자들이 머리만 내밀고 고개를 홱홱 내젖고 있고 뒤쪽에서는 정신병자들로 하여금 나무로 만든 셔터를 쿵하고 닫게 함으로써 단두대가 주는 효과를 만들었던 것이다. “처형”(deofid)이라는 주제적 암시를 부각시키기 위해 여러색으로 된 피가 깔때기로 부어진다. 민중들에게 빨간색, 귀족계급에겐 파란색, 지식인들에겐 하얀색.


가장 논란이 일었던 장면은 마라가 욕조 밖으로 나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그의 엉덩이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964년에 이러한 것은 충격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극이 끝나갈 즈음엔 정신병자들은 관객들에게도 폭력을 휘두를 것처럼 위협하면서 소리를 지르며 무시무시한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결정적 순간에 누군가 무대로 올라와 호루라기를 불면 모든 동작이 정지된다. 그리고 나서 배우들은 조용해지면서 가면을 벗는다. 관객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박수를 치기 시작하고 배우들도 천천히 박수를 친다―관객들로 하여금 시각을 돌려 그 일을 다시금 숙고하게 하면서. 브룩은 떨떠러름한 결말에 이르기까지 아르또-브레히트의 변증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US


극단은 그 전쟁에 대해 열심히 독서했고 그들의 연구와 토론에 근거한 즉흥연기를 만들었으며 다양한 미국의 신화와 문화에 관한 자료를 조사했다. 현대의 한 조류인 “해프닝”을 실험하기도 하고 작가 데니스 캐넌(Denis Cannan)과 찰스 우드(Charles Wood)에 의해 다듬어진 『산 신문』(Living Newspaper)를 만들었으며 런던의 올드비치 공연 중에도 계속해서 수정을 보았다. 작품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수잔 손탁, 조셉 차이킨, 예르지 그로토프스키와 같은 방문객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대부분의 마지막 소재는 신중하게 웃음을 자아내도록 했는데 그것은 민중이 엄청난 재난을 당했을 때 웃는 그런 웃음이었다. 『US』를 연습하면서 브룩은 배우들이 베트남에 대한 그들 자신의 반응을 즉흥적으로 연기하도록 하게 하였다. 처음엔 무기력과 부끄러움이 더하여 그들을 압도하였으나 한달이 지나자 그들은 처음의 표현을 떨쳐버리고 동료들과 함께 고통을 공유하게 되었다. 브룩은 고통의 공유로 나가게 된 것을 사회적 돌파구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룹의 유대를 강화했을 뿐 아니라 배우들 각자의 자의식을 고양시켰기 때문이다. 브룩에게 있어서 배우가 그 이상의 더 가치있는 목표를 성취하기란 불가능한 것이었다. 노래, 춤, 마임, 가면, 거대한 아르또적 인형과 모든 종류의 제의적이고 연극적인 대소도구들과 효과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의상은 브룩과 디자이너 셜리 제이콥Sally Jacob이 개막 이틀전 리허설 때 배우들이 입은 옷이 괜찮다고 생각하여 본래의 의상을 취소하였다. 가장 논란이 일었던 장면은 끝부분이었는데 불교의 순교자가 입적하는 장면을 본따 나비 - 종이로 만든 - 가 산 채로 불타는 장면이었다.


비평은 반반이었다. 부정적 시각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작품이 복잡한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켰고 결론에서 전향자들에게 설교하는 식으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으며―화가 난 보수진영으로부터는―그 문제의 베트공 쪽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균형을 잃었다는 혹평을 받았다. 그것은 또한 엉성한 연기와 미학 때문에도 점수가 깎였다. 긍정적 시각에서는 그 당시 세계의 가장 뜨거운 이슈에 대해 대중들에게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던졌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었다.


『외디푸스』 Oedipus


2년후 브룩은 방향을 선회하여 잘 공연되지 않는 세네카의 『외디푸스』를 리바이벌하였다. 그 작품은 데이빗 안소니 터너가 번역하고 영국시인 테드 휴이가 새롭게 쓴 작품이었다. 브룩은 외디푸스가 진실을 일부러 회피하는 인간의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문제를 고찰한다는 점에서 『US』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했다. 즉 대본―잔인성과 원시주의의 이미지로 가득한―은 베트남에서 벌어진 최근의 사건들이 허무한 반향을 울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존 길거드, 이렌느 월스와 콜린 블레이클리는 정신적으로나 미적으로 금욕주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그들은 육체의 움직임을 극히 최소화함으로써 기이한 목소리의 테크닉을 강조했다. 이 “콘서트 공연”은 갈색과 검정 벨벳의 매우 단순한 의상을 사용했고 코러스는 오디토리움에 분산시켜 놓고 그곳에서 원시시대의 제의를 연상케하는 샤머니즘적 방식으로 비탄하고 울부짖도록 했다: 이것은 아르또가 사용했음직한 효과를 연상시켰다. 브룩은 무대 중앙에 금속으로 된 거대한 회전하는 정육면체의 세트를 만들었다. 이 정육면체는 마치 초자연적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조명을 번쩍이는 광선으로 반사했다. 코러스는 그 정육면체를 열어서 새로운 연기공간을 보여줄 수 있었다.


그 정육면체의 앞쪽의 연들이 분리되어 동시에 내려와서는 경사로가 있는 개방된 공간을 만들었다―아니면 전체 장면에는 인물들을 그 안에 둘 수도 있었다. 거대한 금으로된 뚜껑이 걸려 있었다... 훨씬 작은 금으로 된 정육면체에는 배우들이 때로 앉기도 하고 배우들이 치는 북이 되기도 했다.


연극은 코러스가 브룩과 리차드 피슬 리가 작곡한 뮤지컬 곡을 부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나서 무대 위의 배우들이 금으로 된 북이기도 하고 앉는 자리이기도 한 정육면체를 두드리기 시작하면 오리토리움에 있는 코러스들이 기둥을 두드린다. 점점 두드리는 소리가 커지다가 갑자기 멈추면 정육면체가 열리고 무대가 하나 만들어지면서 연극이 시작된다.


외디푸스에서 관객들은 비인격적이고 성직자와도 같은 스타일의 연기 때문에 감정을 느끼기가 힘들다. 인물묘사에 있어 어떠한 사실주의적 시도도 허용되지 않는다. 길거드가 연기한 외디푸스는 나이 들어 보이기 위해 분장하지도 않았고 절뚝거리지도 않았다. 그가 자초한 실명은 티레시아스의 얼굴을 벗고 어두운 안경을 쓰는 것으로 암시되었다. 조카스터를 연기한 월스는 무대 위에서 죽는다(성의 희생이라는 기념비적인 상징적이미지로써 검에 꿰뚫려 죽는다). 그리고나면 2명의 코러스를 수반하여 조용히 걸어나간다. 관객 사이로 등장하는 방법이 특별한 효과를 위해 사용되었다. 특히 외디푸스가 전국의 양치기를 불러모으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관람석 사이의 복도로 무대를 향해 배우가 발을 질질 끌고가는 희미한 소리에 깜짝 놀라게 된다.”


마로비츠는 브룩이 이 작품을 택한 이유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 음조의 효과와 문학적 이야기의 해석”을 사용하여 무대작업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브룩의 가장 악명높은 자만은 7피트의 금으로 된 남근상의 끝에서 빙글빙글 돈 것이다. 이때 재즈밴드는 “그래요, 우린 바나나가 없어요”를 연주하였고 단원들은 그 기둥 주위를 돌며 춤을 추었다. 보이스 리차드슨은 “그들은 즐겁게 춤추고 소리질렀으며 무대에서 객석의 보도로 뛰어나갔다 돌아오기도 하고 재즈 연주자들을 쫓아 돌아다녔다. 그러다 미친 듯이 추어대는 지루박과 춤의 파티에 찬물을 끼얹고 입고 있던 금으로 된 옷을 공중으로 던졌다”고 쓰고 있다. 그것은 비극적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긴장된 순간에 김이 빠지게 하는 바커스적인 흥청망청한 한판의 순간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객뿐 아니라 배우들도 당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만은 성공한 것 같았다.


『템페스트』 The Tempest


외디푸스와는 달리 브룩이 1968년에 만든 『템페스트』는, 언제나 관객에 대한 배우의 관계를 탐구하는 그는 이번에도 연극공간을 급진적으로 조정하여 이러한 요소를 다양화하는데 어떤 원칙들이 연관되어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했다. 브룩의 이전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프로시니엄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의 프로덕션이 파리에 문을 연 이후인 지금 그는 프로덕션을 “라운드 하우스”(Round House)라 불리는 폐허가 된 런던의 기차역사로 옮기고 거기서 디자이너 장 모노(Jean Monod)와 함께 공간적 환경을 즉석에서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관객들은 비계(조립식 무대)에 앉도록 했는데 거기서 그들은 배우들에 의해 쓸려버릴 수도 있었다. 거기는 ‘위험한’ 지역이었다. 아니면 ‘안전한’ 자리에 앉으면 거기서는 점잖게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무대장치의 대표자인 리차드 쉐크너는 곧 뉴욕에서 『디오니소스'69』와 그 밖의 다른 작품을 제작할 때 이와 비슷한 방법을 사용했다.


브룩은 파리의 연극 페스티벌의 일환으로 장 루이 바로의 초청을 받아 구성된 국제적인 극단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 이 국제적 극단은 결국 1970년에 논의될 「연극연구를 위한 국제센터」(International Center for Theatre Research)로 발전된다. 『템페스트』에서 브룩은 외국배우들에게서 보편적이고도 종합적인 연극스타일을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들은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그들이 자유롭게 바꾸고 삭제하고 배열을 변화시킨 많은 단어들과 이미지로 다루었다. 이러한 방법은 마로비츠의 꼴라쥬 『햄릿』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뒤엉킨 구조, 새롭게 고쳐진 인물간의 관계, 놀라운 시간의 변화, 합창단의 합창, 의미의 상징이 아닌 음향효과로서의 말, 주문, 분명한 성적 이미지, 아크로바틱, 특이한 의상들, 그로토프스키 얼굴가면, 관객들과 섞이기―이러한 모든 것이 그렇게 비판 받아오는 실험의 특징이었다. 심지어 극이 시작되기 전에 관객들은 게임을 하거나 목소리나 몸을 훈련하면서 워밍업을 하는 배우들을 볼 수가 있었다. 부정적 비평의 시각에도 불구하고 브룩은 꿋꿋했다. 그는 그 작품을 끝난 작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배우들이 관객들의 생생한 반응을 그 작품에 맞추게 하기 위해 관객을 필요로 하는 아직 진행중인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 브룩의 과학자적인 면모가 있는데 그는 그의 길을 충실히 따르면서 세상이 그를 뭐라고 생각하든 그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추구하였다. 사실상 그는 그러한 실험주의적 작품에는 자기의 선입관으로 가득 찬 근엄하고 비판적인 어른보다는 어린애같은 관객이 더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템페스트에서 배우들은 전통적 속박으로부터 자유, 기존의 연극계에서는 거의 허용되지 않는 감정적 신체적 비행을 시도하게 했던 자유를 추구하고 있다. 배우들에게 부여된 자유는 브룩의 다음 명작인 『한여름밤의 꿈』에서는 새로운 훈련방법과 조화를 이루지 못했다.


『한 여름밤의 꿈』 A Midsummer Night's Dream


셰익스피어의 『한 여름밤의 꿈』은 브룩의 막강한 연극 10년사 중에서도 압권이었다. 그의 목표는 연극의 오랜 역사 동안 전통적으로 달콤한 장면이 으레 갖추는 부속품들로부터 연극을 자유롭게 할 생각이었다. 그는 20세기 관객들에게 통하는 마술에 관한 연극을 만들 수단을 찾은 것이다. 그는 그 연극에서 온갖 전통적 기법들을 없애 버리고 단순함과 빛의 세계를 선보였다. 하얀 색의 스쿼시 코트―정육면체의 세트로 머리 위의 은하수로 올라가는 몇 개의 검은 수직 사다리가 있다: 땅딸막한 어른 남자요정은 중국 곡예사들에게 영감을 받아 만든 헐렁한 회색의 실크 파자마 같은 의상을 걸치고 있다: 공중그네, 접시돌리기, 죽마를 포함한 서커스적 요소: 머리 위의 은하수에서는 배우가 낚싯대를 가지고 반짝이는 금속 코일의 숲을 만든다: 색다른 악기를 사용하는 상상력 넘치는 리차드 피슬리의 작품: 보텀의 당나귀 의상은 나막신처럼 생긴 신발과 광대의 검정색 코와 당나귀 귀였다. 이 당나귀 귀는 브룩과 디자이너 샬리 제이콥이 만든 것으로 혁명적인 시각개념의 하나였다. 이것은 그리하여 하나의 연극적 의식이 되었으며 그러한 축제는 서커스의 그것보다 더 잘맞는 이미지도 없었다.


브룩은 뉴욕 포스트지의 제리 톨머에게 그가 하얀색 장면배경을 선택한 이유를 말했다. 이 연극에 관통하고 있는 첫 번째 것은 어둠이다... 그로부터 그 밖에 모든 것은 내려간다. 우리가 하고자 했던 것은 그 작품 주변에 아무것도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찬란하게 빛나는 하얀색을 사용했다. 그 색은 완전히 중성적이고 배우들이 말하고 있을 때 말하는 것만을 드러나게 해준다.


그 연극 안에서는 환상과 실제의 세계가 더블 캐스팅을 사용하여 한데 묶여지고 서로 혼합된다―오베론 역에 테세우스, 퍽 역에 필로스트레이트, 퀸스 역에 에게우스, 티타니아 역에 히폴리타를. 최근에 연구했던 비언어적 기법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말은 꾸미지 않고 분명하게 앞으로 나왔다. 1968년의 『템페스트』와는 다르게 여기서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본래 대로 살려 두었다. 스탠리 카우프만은 이 쇼의 캐스트 앨범은 1890년경의 극단의 그것과 유사한 것 같다고 말한다: “몇 가지 예를 제외하면 시는 고전적 의도로 읽혀지고 코믹한 부분은 비어본 트리(Beerborn Tree)를 즐겁게 해주었을 것 같은 스타일로 다뤄진다.” 그러나 카우프만의 흥미로운 비평은 그 연극의 추상적 장면의 형상화는 전통적인 언어적 스타일과 매우 안 맞고 결국 장면의 개념이 정당성을 획득하지 못한다고 논한다. 또다른 비평은 배우들이, 관객들이 그들 나름대로 읽은 텍스트의 의미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을 간과하고 때로 과도 하게(그리고 올바르지 않은) 직설법적인 자세로 그 텍스트를 표현했다고 논평한다. 그리고 물론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전례없이 분명하게 표현하려는 브룩의 모든 주장에 대해 이것이 결국 “피터 브룩 쇼”였으며 셰익스피어식 작품해설이 아니라 연출적 창의력에 대한 변명에 불과한 것이라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트랫포드에서 『꿈』을 상연하면서 1971년에는 미국과 캐나다로 순회공연을 하였다: 브로드웨이에서도 공연된 데 이어 「브루클린 음악아카데미」(BAM)에서 2주간 공연했다. 거기서 브룩은 그 다음해에 벌여 놓을 많은 중요한 모험에 열중하였다. 『꿈』은 1971년에 런던의 올드위치에서 공연되었고 1972년엔 유럽을 순회하였고 그 다음 해에는 세계 순회공연을 했다.


1970년대: 「연극연구를 위한 국제센터」 ICTR


브룩은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웠을 최고 수준에 달했다. 기대했던 대로 그는 기대치 못한 뜻밖의 일을 해보였던 것이다. 『템페스트』 이후 그는 배우의 개발과 관객간의 관계 문제에 점점 힘을 쏟아 집중했던 결과로 상업적 제도적 연극계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1970년에 그는 그의 파트너인 에이전트이자 제작자인 프랑스인 미쉐린 로잔(Micheline Rozan)과 함께 파리 에서 ICTR을 설립했다: 이 야심찬 계획은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1968년 브룩이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연극예술가들로 구성된 연극축제 워크숍을 운영했을 때 이미 계획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센터는 150명이 넘는 지원자 중 브룩이 직접 인터뷰하여 뽑은 12개 국가 출신의 교수진을 가지고 오래된 직조공장의 넓은 공간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재정적 뒷받침은 문부성과 설립기금에서 충당하였다. 여기에서 브룩은 그의 탐구를 방해하는 어떤 상업적인 압력도 배제한 채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할 수 있는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그는 상업적 체제에서 완전히 벗어남으로써만 연극의 전형적 문제들(예를 들면 아레나, 프로시니엄, 돌출무대, 환경)과 관객의 기대, 경제적 요소 등을 신경쓰지 않을 수 있었다. 브룩은 루마니아, 프랑스, 독일, 영국, 아프리카, 일본, 말리, 미국 등지의 배우들이 섞여 있는 극단과 일하면서 “그들이 표현을 공감하려 할 때 다른 문화간의 충돌을 통해 새로운 어떤 것을 배울 수 있는지 어떤지를 탐구할” 수 있었다. 그는 함께 일하는 서로 다른 문화의 배우들이 “때로 자기들 문화에서만 상투적으로 쓰이는 문구들을 서로 통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완전한 진실은 세계적이다: 연극은 훌륭한 조각 맞추기를 할 수 있는 곳이다”라고 생각했다.


『오가스트』 Orghast


브룩과 그의 극단은 아침 10시에 시작하여 언어, 음향, 동작을 사용하는 여러 가지 훈련을 하면서 매일 오랜 시간 동안 일했다. 여러 국가들로부터 전문가가 극단을 방문하여 음성과 육체적 기술을 골고루 가르쳤다. 극단의 첫 번째 대중공연은 이란의 페르세폴리스에서 있었던 제5회 쉬라즈 국제 예술 페스티벌에서였다. 거기서 그들은 테드 휴이와 공동으로 만든 『오가스트』를 공연했다. 이란인 예술가들은 파리에서 브룩의 배우들과 그 작품을 한 적이 있었고 그 공연에도 참여했다: 또한 타지에(ta'zieh)라고 하는 제사를 지내는 곳과 같은 이란의 무대형태는 그 공연에 영향을 주었다. 『오가스트』는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한 몇 달간의 실험의 결정체였다―『오가스트』는 그 공연을 위해 특별히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 아베스타어에서 만들어진 말로 그 의도는 이 말이 문자적 의미의 직접적 전달자로서가 아니라 음향과 주문과 같은 아르또식 언어로 사용될 때 어떤 감정의 느낌을 만들어내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오가스트』는 “자음, 모음의 소리와 단어의 음절을 이용하여 복잡해 보이는 긴 음조와 의성어의 소리구조를 만들었다.” 브룩의 프로그램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언어적 연극과 비언어적 연극의 관계는 무엇인가? 몸짓과 음향이 말로 바뀌어질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연극적 표현에 있어서 말이 점하는 정확한 위치는 어디인가? 느낌으로서? 개념? 음악? 어느 고대 언어의 소리구조 속에 어떤 단서가 들어 있지 않을까?


『오가스트』는 야외에서 훌륭한 경관을 배경 삼아 공연되었다. 경관의 지형은 공연의 물리적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부는 250년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과 알탁세르세스1세 왕의 왕실 무덤 앞에 설치된 플랫폼에서 공연되었다. 그것은 해질 무렵에 시작하여 어두워지자 횃불과 불꽃으로 불을 밝혔다. 주된 관심사는 프로메테우스 신화를 비롯하여 고대 신화들을 제의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관객들이 항상 뭘 연기하는 건지 분명히 알 수는 없었지만 한 관객에 따르면 그 작품은 “기이한 다른 나라의 제사처럼 보였으며 모르는 말로 한 외국의 종교의식처럼 불가해했다.”고 한다.


2부는 페르세폴리스에서 6마일 떨어진 나그쉬 루스탐에 있는 다리우스 2세와 알탁세르세스 1세와 3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행해졌다. 2부에서 관객들은 1부에서와는 달리 배우들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이리저리 움직이도록 되었다. “배우들은 절벽 끝이나 평지에서 연기하기도 하고 군인들처럼 문신을 하고는 관객 뒤에 있는 낮은 언덕으로부터 뛰어나오기도하면서 페르시아 군대가 패배했을 때를 연기했다.“


『새들의 회의』 The Conferance of the Birds


첫해에 『오가스트』라는 비언어적 공연 스타일로 주목을 받은 브룩의 극단은 그 다음해 음향과 동작의 훈련을 강조한다. 그 작품의 일부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국립극단」(National Theatre for the Deaf)와 함께 연구한 것을 담고 있다. 이것은 불어로 된 피터 한트케의 『카스파』를 여러 가지로 “자유롭게 해석한 것들”을 다양하게 공연한 점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1972년 후반에 브룩과 그의 극단은 아프리카 외곽을 향했다. 거기서 그들은 열심히 돌아다녔고 『새들의 회의』라는 페르시아의 12세기 시 한편을 가지고 즉석에서 실험을 하였다. 테드 휴이가 또다시 이 시의 언어적 측면을 만드는 것을 맡았다. 『새들의 회의』는 수피교도 시인인 파리드 우딘 아타르(Farid Udin Attar)가 지은 알레고리적 시이다. 그것은 신을 찾는 것에 대한 시로서 이 이야기에서 신은 그를 찾는 이들에게 현현하여 그들 사이에서 살고 허무가 먼저 없어져야만 영생이 세계에서 이뤄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인물들은 후투티라는 새가 이끄는 다양한 종류의 새들로 나온다.


이 작품에서 브룩은 전통적 연극에서 보여주듯이 일상적 존재로부터 커튼 하나에 의해 분리되는 상상의 세계가 아니라 일상적 현실과 상상의 세계가 만나는 지점을 찾고 싶어했다. 이 두 세계가 어린이의 마음 안에서는 공존할 것이라 믿었던 브룩은 아프리카를 여행하였다. 거기서 그는 그 비슷한 능력이 시골 사람들에게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연극의 공연이 그들에게 무엇을 바라는지에 대해서 재빨리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상상적, 그리고 실제적인 면 모두에서 현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는 그런 관객의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반응을 믿었으며 그들은 그 다음 장면에서 흥미를 잃게 되면 곧 자리를 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기본적인 인간의 특질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제 그는 새로운 한다발의 질문들에 답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연극에서 미리 준비되어야 하는 것은 무엇이고 상관하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인물은 무엇이고 인간적 상황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현실을 모방한다는 것이 진실일 수 있는가? 결국 연극은 그것이 무엇을 말하느냐에 따라 일어서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가? 아니면 연극은 무언가 좀 다른 어떤 것인가, 에너지가 어떻게 어떻게 방출되어 만들어지는 도취의 한 형태인 그 무엇?


존 헤일펀(John Heilpern)은 브룩 극단의 3개월에 걸친 아프리카 장정을 따라다녔다. 그는 랜드로바를 타고 이 도시 저 도시 카페트를 깔고 공연할 곳을 찾아 여행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수십 명에서부터 천명 이상에 이르는 군중을 모이게 했다. 그는 그들이 매우 여러 번(실제로 34회) 공연했지만 『새들의 회의』를 자주 공연했는데, 이 작품만이 리허설과 워크숍 활동의 중심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에서 그 작품은 대부분 다듬어지지 않은 즉흥연기 수준에서 그치고 완성된 형태로 볼 수 없었다. 대부분의 특별한 무대 없이 자리를 깔고 하는 이런 공연은 즉흥적이었으며 배우들은 보통 실제 공연이 시작되기 몇분 전까지도 그들이 표현해야 되는 게 무엇인지 몰랐다. 브룩은 이런 것이 주는 “위험”이라는 느낌을 좋아했고 이런 다양한 공연환경에서 오는 스트레스 아래서 배우들이 무엇을 찾아내는지 알고 싶어했다. 보통 소극처럼 행해지는 즉흥연기는 원래 보편적 인간관계 안에서 보여지는 적나라한 감정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 상황들로부터 시작하거나 아니면 특정한 사물들, 예를 들면 신발, 지팡이, 빵 한덩이 같은 것에 대한 상상력 넘치는(그리고 비전통적인) 반응으로부터 나오는 장면으로 시작했다. 미국의 작곡가인 엘리자베스 스와도스(Elizabeth Swados)는 음악적 목소리와 음향의 즉흥연기로 많은 실험을 하였고 특히 솔로로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사람과 합창적 리듬의 관계를 탐구했다. 그 작품은 자주 비참하게 실패했지만 어쩌다 작품이 성공적이었을 때는 브룩이 꿈꾸었던 연극의 가능성으로 그 극단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아프리카에서의 경험을 끝내고 1973년 중반에 『새들의 회의』를 파리에서도 계속해서 끌고 나갔다. 그 다음엔 그 작품으로 캘리포니아로 가서 8주 동안 루이 발데즈(Louis Valdez)의 극단 「엘 테아트로 캄페시노」(El Teatro Campesino)와 함께 일했고 이민 농부들의 노동문제에 관여하여 시위모임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발데즈의 극단이 『새들의 회의』에 참여한 것은 그 극의 형태를 상당히 바꿔 놓았다. 얼마 후 그 극단은 치페와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Native American Theatre Ensemble」과 함께 일했다. 그들은 미국에서의 일정을 BAM에서 마쳤다. 거기서 그 작품을 가지고 5주에 걸쳐 대중적 실험이 행해졌다. 다섯 개의 그룹(그로토우스키의 그룹을 포함해서)이 계속해서 그 작품에 몰두했던 것이다. 브룩은 또한 배우들을 지방의 소수민족지구로 데리고 가서 거리와 학교에서 즉흥연기를 하게 했다. 그 작품에서 새로운 인상을 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밤마다 캐스트를 바꾸었던 그 기간이 지나고 BAM에서의 마지막 밤에 그들은 3개의 공연을 하였다. 하나는 8시에 시작한 즉흥적이고 코믹한 건전한 것이고, 또 하나는 한밤중에 촛불을 밝혀 놓고 한 공연으로서 경건하고 침착하게 의식에서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한 공연이었으며 마지막 것은 동트기 1시간 전 즉흥적으로 연주된 제의적 합창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이 세개 공연의 핵심이 어떤 식으로든 하나가 될 수 있기를 바랬다.


BAM과 그 밖의 곳에서 행해진 『새들의 회의』의 즉흥연기공연으로부터 얻은 아이디어들은 1979년 다시 되살아났다. 브룩은 그해 장 끌로드 까리에르가 쓴 대본을 가지고 샬리 제이콥이 만든 무대에서 그 작품을 리바이벌하기도 한 것이다.(그 작품에 병행하여 새로운 작품이 만들어졌는데 까리에르와 그 극단의 배우 말릭 보웬이 아프리카의 이야기 『Birao Dirop』을 각색한 『뼈L'Os』였다.) 『새들의 회의』는 이전에 그 작품이 표현되었을 때와는 다르게 이제 형식을 갖춘 세련된 연극작품이 되었다. 대본을 갖춘 그 공연은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었고 짧은 유럽순회공연 후에 파리에서 상연되었으며 1980년 뉴욕으로 가서 이스트 빌리지와 라마마 E.T.C에서 공연되었을 때 절정을 이루었다. 이 마지막 공연에서 브룩의 배우들은 바닥에 커다란 페르시아 깔개가 깔려져 있고 뒤쪽에 있는 벽에 마찬가지로 똑같이 커다란 깔개를 걸어 놓은 단순한 세트에서 공연했다. 아름다운 튜닉과 로브를 입은 배우들은 각기 주로 아름답게 만들어진 꼭두각시 인형을 솜씨 좋게 조작함으로써 새를 인간으로 형상화시켰다. 마임, 줄거리 말하기, 가면(대부분 발리섬의 가면)과 음악(일본인 음악가 Toshi Tsuchitori가 만든)이 한데 결합되어 동서양 스타일을 효과적으로 혼합하여 작품을 우아하게 보이도록 했다: 그가 믿는 바대로 그 작품을 보편적으로 호소하는 작품으로 만들려는 그의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관객들에겐 이해가 안되는 신비의 구름이 걷혀지지 않았다.


『아테네의 티몬』 Timon of Athen


1974년에는 파리의 「Theatre Bouffes du Nord」에서 『아테네의 티몬』을 공연함으로써 놀랍게도 셰익스피어로 돌아왔다. 그 극장은 1876년에 지어진 한때는 우아했던 극장으로 내부가 1952년의 화재로 까맣게 타서 수라장이 되었었다. 하층 노동자들이 사는 세인트 데니스 지역에 위치한 몹시 황폐한 이 극장은 벗겨진 칠과 회반죽을 통해 예전의 풍요로움을 엿볼 수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남들 앞에 잘 나서고 싶어하지 않는 초라한 모습의 폐허로 남아 있음으로 해서 새로이 태어났다. 약 500개의 좌석이 있으며 보통 차등 없이 싼 관람료를 받는 이 극장은 브룩의 80년대 작품의 중심무대가 되었다. 『티몬』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브룩은 1968년 『템페스트』에서 그가 사용했던 기본적으로 자유스러운 형식의 스타일로 다시 돌아와서 관객을 계속 작품에 끌어넣고 텍스트를 특이하게 해석하고 여러 국적의 배우를 기용하여 까리에르가 불어로 번역한 별로 삭제 없는 셰익스피어의 문장을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말했다. 연기는 의자를 치워버린 오케스트라 구역에서 행해졌고 관객들은 나무로 된 벤치에 앉았다. 연기에는 많은 신체적인 동작과 곡예적인 움직임이 들어 있었다. 브룩과 그의 극단이 아프리카에서 했던 소위 카페트 공연 중에 터득하게 된 관객과 배우의 비공식성을 셰익스피어를 올리는데도 사용했다. 이전의 10년간 대부분의 브룩의 작품에서처럼 분위기로 인해 어떤 특별한 조명효과 없이 전체적으로 하얀색의 강한 조명을 썼다. 관객과 배우는 완전히 공간을 공유했고 아주 근소한 차이로 서로가 구분되었다. 이러한 배치, 세 군데의 발코니에 관객을 앉히는 것을 포함한 이러한 배치는 브룩의 일련의 모든 작품들 중에서도 여기서 가장 두드러졌다.


브룩은 이 연극을 과장되게 다룸으로써 시대적 주제를 강조했다. “티몬의 아테네는 대장의 아테네다. 티몬은 석유파동으로 인해 잔인하게 꺼져 버린 소비자 천국의 꿈을 꾸었던 산업중심의 서구의 살아있는 상징이다.” 배우들의 의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아랍 문화적 요소가 강하게 보여지는 것과 현대적의상을 절충했다. 어떤 배우는 심지어 젤라바(아랍인의 긴 옷)를 입고 있었다. 아랍식의 축제와 아랍춤도 있었다. 아페만투스는 알제리의 노동자 옷을 입은 흑인이 연기했다. 그의 모습은 티몬의 과장됨을 말해 주는 것이었다. 알시비아데스는 “퇴폐적이고 타락한 아테네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인 군사 쿠데타의 상징”으로 연기되어진다.


The IK


이듬해(1975) 브룩의 그룹은 인류학자인 콜린 턴불(Colin Turnbull)의 에 바탕을 둔 엄격한 작품을 내놓았다. 이 작품은 우간다 북부의 한 가난한 산간부족이 그들의 전통적인 사냥의 특권을 빼앗아 버린 정부 입법의 결과로 어떻게 비인간화되어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톨린 히긴스와 데니스 캐넌에 의해 각색되었고 프랑스 판은 장 끌로드 까리에르에 의해 준비되었다. 여섯 명의 배우와 두 명의 아이들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극단은 먼지로 뒤덮인 마루 위에서 이 단순한 드라마를 공연했다. 인류학자 역할의 한 배우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마을의 여러 인물들을 연기했다. 1976년에 이 작품은 6주간의 런던 라운드 하우스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는데, 남미와 여러 미국의 대학들, 동유럽으로 순회공연되었으며, 1980년에는 다른 주요 작품들과 함께 호주에서 선보였고, 얼마 후 뉴욕의 라마마 극장에 도착했다.


뉴욕에서 공연되었을 때 이 작품은, 등장인물들이 까만 맨살 대신 누더기 옷을 입는 등의 극히 단순화된 ‘가난한 무대’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식량부족이 사람들을 인간성 상실과 부패로 몰아가는 비참함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국제적으로 이루어진 배역설정은 그들이 실제로 배고픈 아프리카 사람들이란 느낌을 거의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두 명의 배우가 입안 가득히 곡식으로 채웠다가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구호물자를 끌고갈 때 다시금 토해내는 장면이 하나의 강한 이미지를 주기는 했지만 극적인 효과들은 미미했다. 배우들이 마을 오두막의 구조물을 세우는 장면은 흥미로웠다.


이 작품은 『IK』의 물리적인 생활환경을 표현하기 위해 즉흥연기를 했던 강도 높은 리허설의 결과였다. 턴불이 제작한 사진과 영화에 나오는 자세와 얼굴표정을 보고 몸동작을 똑같이 본따 했다. 그런 표현들 중 가장 잘 된 것은 대본에 추가되었고 대본은 리허설 과정 동안에 점점 다듬어졌다.


라마마에 온 세 개의 프로그램 중(나머지는 『위비』와 『뼈』이다) 대부분의 뉴욕 비평가들에게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것이 이 작품이었다. 느린 속도와 무뚝뚝하고 자상하지 않은 방식에다 여러 가지로 브레히트의 소외효과를 많이 사용하여 작품의 주제가 적절했다는 세평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깊은비관주의와 냉랭한 감정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을 작품에서 멀어지게 했다. 브룩은 그 작품의 주제가 사실상 서구세계 도시들의 몰락이었으며 이러한 생각은 턴불의 자기 경험에 대한 요약문을 읽으면서 더욱 분명해졌다. 데이빗 윌리엄스가 설명한 대로 『리어왕』 이후 브룩의 작품은 “문명화된 사회의 여러 제한들은 어떤 극한 상황에서 인간 내부의 야수성을 드러내면서 필경에는 제한 자체가 천박하고 잘못된 것이었음을 드러낸다는 믿음”에 의해 허무주의적인 구조를 가지게 되었다(참고로 예를 들면 브룩의 1964년 영화 『파리대왕』이 그러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작품을 그저 자기만족적인 또다른 자유주의 작품일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과 그 동류의 작품들이 지친 다른 전위예술가들이 구식이라고 싫증내기 시작했던 연극적 장치들을 여전히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비평이 더 우세하다.


10년의 끝맺음


1977년 브룩은 「Theatre Bouffes du Nord」에서 매우 익살맞고 수수하며 단순한 작품인 ????(순회공연할 때는 『위비』로 줄였음)를 공연했다. 이 작품은 알프레드 쟈리가 쓴 전환기의 반부르조아이면서 원조 부조리주의자인 “위비”를 중심인물로 한 네 편의 코메디물을 까리에르가 합쳐놓은 것이다. 이 네 편의 코메디물의 대부분은 『위비왕』이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1977년과 78년에 유럽과 남미를 순회하였고 런던에서 잠시 머물다가 카라카스에 있는 「Theatre des Nations」에도 방문하였다. 와는 달리 『위비』(자주 영어가 끼어드는 불어로 공연되었다)는 최소한의 세트와 의상에도 불구하고(대개는 그 때문에) 재치있는 연극적 아이디어가 많았다. 즉흥극에 의존한 결과 연극은 막대와 벽돌, 그리고 특히나 두개의 커다란 전선타래와 같은 “발견된” 소도구에 크게 의존하게 되었다: 둘 중에 더 큰 전선타래는 세 사람으로 된 군대를 넘어뜨리는 데 사용되었다. 타래가 그들 위로 지나갈 때 마치 도로공사용 증기롤러에 깔린 것처럼 바닥에 납짝 엎드렸다. 모든 소도구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사용되었고 매우 상징적일 때도 있었으며 다용도로 쓰였다. 원작에서 요구되어지듯 추상적이고 꼭두각시같은 의상과 분장을 하는 대신 평범한 노동자로 연기하게 했다. 관객이 참여하는 부분을 많이 만들었으나 때때로 관객들이 잘 나서지 않았다. 개막극으로 무대에 올려졌던 단순한 우화극 『뼈』에서처럼 그 작품의 최고의 성과는 그 극단이 분출하는 에너지와 즐거움이었다. 브룩은 말하기를 마치 배우들이,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디서든 무대를 만들 수 있는 일단의 지방순회극단처럼 “거친” 무대의 진정한 의미로 다가왔다고 하였다.


도덕극 『뼈』는 죽어야 할지라도 골수를 내놓지 않으려는 인간의 아주 단순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뼈』는 이야기-연극(story-theatre) 기법을 썼다. 이 작품은 1982년 런던을 포함한 짧은 유럽 순회공연에서 마지막으로 리바이벌되었다.


『뼈』와 『위비』, 『새들의 회의』는 굶주림이라는 주제에 대한 일종의 삼부작으로 간주된다. 존 헤일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프레드 쟈리의 『위비』: 권력에 굶주린 부조리주의자, 『뼈』는 아프리카의 민속이야기: 재물에 굶주렸다, 콜린 턴불이 각색한: 생존에 굶주렸다, 『새들의 회의』: 삶의 다른 방법에 굶주렸다.


70년대 후반 브룩 작품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는 극단이 여러 지역으로 여행을 하며 “때묻지 않은” 관객을 위해 공연하고 작품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테스트했다는 것이었다. 에릭 숄터(Eric Shorter)는 1978년에 그들이 베르사이유 근처의 신도시에서 일단의 알제리인 이민자들 앞에서 공연한 것을 보았다. 늘하던 것처럼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진 무대에서 관객의 반응에 따라 즉흥연기를 하였다.


기본 사상은(숄터가 말하길) 임시노동자인 관객을 즐겁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즉흥적으로 하는 연기가 공연자들에게 중요할 뿐 아니라 연극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즉 그러한 공연이 관객들에게 리허설 텍스트만큼이나 많은 즐거움을 예술적으로 안겨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또한 동시에 관객과 배우들 간의 긴밀한 관계를 구축할 것이다.


「The Bouffes du Nord」는 1978년에 브룩이 새롭게 해석하여 호평을 받은 『이에는 이』의 고향이었다. 까리에르의 번역으로 중심배우들이 음악도 없고 세트라고는 벤치 몇 개에 짚단을 좀 갖다 놓는 식의 간소한 스타일의 워크숍으로 연기되었다: 의상은 현대를 나타내는 듯 했고 연극의 정치적, 성적 주제에 대한 접근―거기엔 이자벨라의 존재가 잔다르크같은 인물로 연기되었고 공작은 페미니스트처럼 루시오에게 동성애적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은 현재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었다.


『이에는 이』가 개막되기 한달쯤 전에 스트랫포드에 있는 로열 셰익스피어 극단은 글랜다 잭슨과 알란 하워드를 주연으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를 영어로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약간 수정된 작품이 런던에서 올려졌다. 엄격하게 제작된 이 작품은―거의 전 텍스트가 다 사용되었고 고어가 사용되는―샬리 제이콥스가 무대장치를 맡았다. 마이클 쿠스토우에 따르면 샬리 제이콥스는 반투명 소재로 된, 틀이 나무로 된 스크린을 설치하였다. 그것은 두껍고 자연산 라피아잎으로 만든 깔개, 칠하지 않은 벤치와 2개의 빛나는 걸상이 놓여져 있는 연기구역을 에워쌌다. 스크린을 통해 인물들이 등장할 때 유령 같은 이미지를 볼 수 있었다. 반투명의 표면은 의상과 바닥에서 나오는 빛을 모았다. 그것은 태양, 바다, 모래의 빛을 증류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것은 그 연극이 이집트와 지중해 유역을 무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며 붕괴와 변태라는 이미지를 많이 느끼게끔 했다.


브룩은 인색한 장면전환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연기와 감정에 결정적인 순간에만 변화를 볼 수 있게 했다.


빛이 폭발하듯 퍼져나와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가끔씩 인물이 등장하는, 스크린 너머의 반만 보이는 곳은 큰 전쟁터와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는 안토니의 끔찍한 붉은 피가 스크린 너머로 튀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쓰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죽는 장면에서는 장엄한 마지막 극적 장면을 위해 피얼룩의 색을 연상케하는 붉은 카페트가 깔렸다.


의상은 거의 다 단순했고 암시적이었다: 전체 배우가 아라비아나 북아프리카에서 입는 것 같은 로브를 입었다. 연극이 진행됨에 따라 인물을 구별하기 위해 마련된 독특한 요소들이 덧붙여졌으므로 의상의 유사성은 점차 없어졌다. 브룩은 『리어왕』과 『한 여름밤의 꿈』을 만들 때는 그의 관점에 대한 동의나 영감을 얀 코트에게서 발견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브룩은 개인적이자 동시에 공적인 차원을 인정하는 작품에서 오직 개인적인 차원만을 인정하는 것으로 만들어 몇몇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반투명의 판을 통해 희미하게 보이는 외부세계는 멀리 있는 비실재적인 곳으로 보였다. 작품의 서사시적 웅장함은 방에서 벌어지는 일로 축소되었다.


브룩이 해낸 무대 아이디어 중 어떤 것들은 무척이나 독창적인 것이었다. 그 중에는 폼페이의 군함에서 파티를 하는 장면과 대조를 이루는 파르티아 왕의 아들 파코루스가 학살당하는 장면이 있다. 다른 것으로는 위에 언급한 대로 붉은 카페트를 사용하여 클레오파트라의 기념물을 암시한 것이다.


1980년대


80년대 동안에도 브룩은 계속해서 논쟁을 일으켰고 항상 놀랍게도 새로운 개념으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전통적인 것은 『친-친』으로 프랑소와 빌레두가 1959년에 만든 통렬한 드라마를 1983년에 리바이벌하여 히트시켰다. 이 작품은(모리스 베니슈와 합작으로) 몽파르나스 극장에서 15년만에 무대에 처음 서는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이안니가 주연하여 최소한의 장면으로―스크린 몇 개와 장식을 하지 않은 채 드러낸 후미벽, 무대담당은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가구를 옮겼다―무대에 올렸다. 마스트로이안니의 상대역은 나스타샤 패리였다.


20년 동안 브룩의 연극작품은 고전적 성향을 띠었다. 『벚꽃 동산』을 위시로 하여 1981년엔 『카르멘』(『카르멘의 비극』으로 제목을 바꾼)을 급진적으로 다루었고 1985년에는 획기적인 작품 『마하바라타』를 무대에 올렸다. 모든 작품은 본래는 불어로 공연되었고 곧 리바이벌되어 세계를 순회공연했으며 영어로도 공연되었다.


『벚꽃동산』 The Cherry Orchard


체홉의 『벚꽃동산』은 브룩(그는 러시아어를 읽을 줄 알았고 적어도 6개 국어를 했다)과 까리에르가 만든 새로운 형태로 뷔페 뒤 노르에서 공연되었다: 구두점을 지킬 만큼 가능한 체홉에 충실하려고 했다. 특별히 엄선한 배우들―라넵스카야 부인 역에 나스타샤 페리를 포함해―이 체홉의 이야기에 푹 빠져서 즉흥연기를 사용하면서 10주간 연습했다. 연기는 대부분 전체무대의 3/4에 해당되는 것에서 행해졌지만 가끔은 무대 전체를 사용하기도 했다. 라넵스카야 집에 살던 사람들이 바삐 떠날 준비를 하면서 발코니와 복도, 계단에 있을 때 로파킨 혼자 무대 중앙에 서서 샴페인을 마시는 장면이 그런 경우이다. 모든 불필요한 부분은 없애려고 하는 브룩의 목표에 꼭 들어맞게 클레 오볼렌스키(Chloe Obolensky)의 장식은 골격만 갖추고 있어 장면에 필요한 최소한의 기구와 소품뿐이다: 한쌍의 의자와 몇 개의 커다란 스크린, 책장, 몇 개의 아름다운 페르시아 카페트는 중요한 초점이다: 배우들은 보통 그 위에 앉거나 여기저기 널려있는 쿠션 위에 앉는다. 끝장면에서는 매우 인상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는데 가족이 떠났음을 표현하기 위해 카페트를 치워버렸을 때 아무것도 없는 빈 무대 바닥은 그 장면의 쓸쓸함을 더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볼렌스키의 훌륭한 의상은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이었고 그 인물들을 잘 드러나게 했다. 브룩의 무대는 단연코 감상적이지 않았으며 체홉이 실재와 신화의 복합으로 본 그의 텍스트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한 비평가는 이 작품은 브룩의 『리어왕』을 베케트의 틀로 만든 것이라 했다. 각 역할에 있어서는 예상 밖으로 만족스러웠으며(가장 놀라운 것은 로파킨이었다) 유머와 슬픔이 상쾌하게 혼합되어 있는 공연이었다(전자를 더욱 강조하는): 자연주의적인 앙상블 연기스타일은 많은 의미를 말로 했으나 삭제 없는 텍스트를 이렇게 풍성한 의미를 모두 담아 공연하다보니 2시간 15분이 걸렸다(휴식시간은 없었다).


1983년에 『벚꽃동산』을 뷔페에서 재상연했고 1988년에는 BAM에서 엘리자베타 라브로바에 의한 영어판이 공연되었다: 얼마 안 있어 그것은 모스크바와 소련의 다른 지역들에서 선보였으며(러시아에서 만들어진 작품들보다 더 체홉적이라고 갈채를 받았다) 그후 일본으로 갔다. 이 영어로 된 작품은 계속 패리가 라네브스카야 역을 맡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가예브 역에 두각을 나타낸 유명한 스웨덴 배우 얼랜드 조셉슨을 포함한 새 극단을 썼다. 그러나 이 다국적 캐스팅은 혼합된 엑센트로 인해 다소 불편을 겪었다.


『카르멘의 비극』 The Tragedy of Carmen


『카르멘의 비극』―1981년에 파리에서 개막하여 1983년 말 뉴욕의 비비안 부몽 극장에서 공연하고 1986년에 일본을 순회공연한―은 본래 오페라였음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연극작품이었다. 10주간의 리허설은 늘 그렇듯이 즉흥연기에 대해 강조를 했고 동작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연습을 했다. 이것은 브룩이 오페라 가수들의 전통적인 진부한 표현을 벗어버리겠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신체적 표현수단과 음성적 표현수단을 통일시켰다. 마리우스 콘스탄스는 비제의 유명한 작품을 상당부분 삭제하고 재구성하여 14명의 챔버 앙상블에 맞추었고 이들은 종종 두 그룹으로 나누어 무대에 섰다: 프롸스퍼 메리메의 비극적인 이야기가 만들어내는 극적 효과에 있어 음악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메리메는 브룩과 까리에르의 도움을 받아 Meilhac-Halevy의 대본을 상당 부분 수정하였다. 비평가 프랭크 리치는 그 결과를 이렇게 기술하였다 :


열기를 더하고 사회적 배경을 벗어버린 『카르멘』은 더 이상 카르멘의 자유스런 집시의 열정과 호세의 억압된 부르조아 가치관 사이의 갈등이 아니다. 이제 카르멘과 호세는 욕정과 실존적 살해욕에 의해 가속화되는―스스로에게 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죽음을 몰고가는―서로의 자기파괴라는 원초적이고 잔인한 이야기 속의 동등한 파트너이다.


전체 공연은 약 1시간 20분 정도만 걸린다. 많은 음악 애호가들은 그들이 보기에 작품의 모독적인 개작에 분노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이 새로운 표현이 보통의 평범한 작품들보다 극적인 요소를 더 잘 드러내 준다고 보았다. 몇몇 역은 여러 사람이 연기했는데 가장 특기할만한 것은 카르멘 역이었다.


카르멘은 국적이 다른 3명의 소프라노가 돌아가며 연기했다: 미국에서 한 작품에서는 5명의 카르멘이 출연하였고 다국적인 요소를 다민족적인 것으로까지 확대했다. 브룩의 인물설정은 단지 목소리에 재능을 가진 가수보다는 연기할 수 있고 정말 그 역에 잘 어울리는 가수를 선호했다. 브룩은 특히 신체적으로 매력있고 노래도 잘 하는 많은 가수들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뚱뚱한 스타 가수들이 로맨틱한 주인공을 연기했던 기존의 오페라에 공개적으로 도전한 것이다. 카르멘의 엄청난 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많은 수단이 간구되었다. 브룩은 아리아를 순수한 음악적 삽입으로서가 아니라 생생한 극적 장면으로 만들었다.


비비안 부몽에서의 무대는 돌출무대를 사용했다: 본래 무대 장치가 안되어 있는 플랫폼을 투우장처럼 모래와 흙으로 덮었고 주변에는 쿠션을 대충 놓아서 10$로 할인된 입장료를 내는 관객들이 앉도록 했다. 링의 뒤쪽은 나무로 된 판자를 써서 곡선을 이루는 벽을 설치했다. 개막공연에서처럼 많은 제의적 요소가 사용되었다. 주로 점치는 카드와 나중에 산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마술적 빛을 발하는 불이 사용되었다. 상업적인 이유로 뉴욕 공연 동안에는 불어공연이(가끔씩 영어가 끼어드는) 영어로 새로 만든 공연과 교대로 공연되었다.


『마하바라타』 The Mahabarata


브룩의 가장 최근 작품은 『마하바라타』였다. 그 작품은 브룩과 까리에르가―그들은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그 작품을 다듬었다―18권으로 된 성서보다 15배나 긴 인도의 위대한 산스크리트어 서사시를 정리한 것이다. 그 안에 표현되고 있는 이야기와 사상 그리고 또다른 위대한 산스크리트어 서사시 『라마야나』는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종교와 문화에서 핵심적인 것이다. 동남아 지역에서는 그것들이 수많은 예술적, 문화적 형태로 고전적 형식과 현대적 형식을 빌어 재현되고 있다. 브룩과 까리에르는 이 작품의 준비를 위해 인도로 수없이 여행을 하였고 거기서 그들은 인도의 다양한 대중적 형태의 공연을 연구했으며 리허설 기간의 한가운데 전 극단을 이끌고 2주간 그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대본은 리허설 기간 동안에도 계속해서 수정되었고 심지어 무대에 올려져 공연 중일 때도 수정되었다.


브룩과 까리에르는 그 작품을 사흘 연속 밤마다 3시간이 넘게 공연하는 3부작으로 계획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공연을 하루만에 전체극을 다 보는 마라톤식으로 공연되기도 했다: 중간 휴식과 저녁 먹는 시간을 포함해 11시간이 넘게 공연되었다. 늘 그렇듯이 인류에 대한 브룩의 절망적 시각이 이 작품을 만드는 데 주요한 동기적 요소였다. 작품의 제목을 대충 번역하자면 “세계의 위대한 시”를 뜻한다: 이 작품의 복잡한 형이상학적 그리고 도덕적 실타래 중에서 신화에 나오는 삽화적 이야기인 5명의 판다바 형제와 그들의 사악한 사촌인 카우라바스 가문 간의 싸움은 서로 적대적인 인간군대의 전형적인 싸움처럼 보여진다: 원한이 절정에 달하자 8백만 명을 죽이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여 초래되는, 공연에서는 거대한 폭발로 표현되어진 그 종말은 그 의미를 설명해 줄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천국으로 설정된 에필로그에서는 희미하게 화해의 기미를 보여주는 것으로 끝맺는다. 브룩은 이 작품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것은 좋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좋은 것인가? 그것은 피할 수 있는 인간 존재 양식의 일부인가? 폭력을 단절시키려고 노력하는 편이 나은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편이 나은가?”와 같은 많은 정당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덧붙인다. “오늘날 우리가 안고 사는 모든 문제들이 이 작품에 의해 극화되고 있다.”


『마하바라타』는 1985년 봄에 뷔페 뒤 노르에서 초연되었고 그 다음엔 아비뇽 여름 연극제에서 공연되었으며 아테네, 마드리드, 프랑크푸르트로 순회공연을 하고 파리로 다시 돌아왔다. 아비뇽 연극제에서 이 작품은 아비뇽 남부의 부르봉에서 석회석 채석장에 임시로 만든 실외무대의 유려한 경관을 배경삼아 토요일 밤마다 땅거미가 질 무렵부터 동이 틀 때까지 공연되었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 관객들은 배를 타고 와서 그 험한 지대까지 올라와야만 했다.


10달간의 맹렬한 연습기간 동안 그들은 주로 즉흥연기의 작업과 쿵푸와 같은 무술을 포함한 다양한 훈련에 몰두했다. 음악과 동작 연습은(전자는 토쉬 츠키다리가 지도했다) 배우들이 자유롭게 음악적 신체적 표현방식을 발휘하도록 도왔다.


극단은 평생을 연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마스터할 수 없을 인도의 전통연극방법을 피하고 대중연극이라는 정신에 입각하여 많은 가닥의 이야기를 한데 묶어 주는 방법으로 어린 소년―관객을 나타냄―에게 이야기를 다시 설명해 주는 스토리텔러를 설정한다. 인도연극의 형식은 힌트를 주었을 뿐 그대로 베끼지 않았고 다른 전통들에서 온 많은 기법들이 적절히 실행되었다. 그 효과는 어느 한 국가의 연극기법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으로 쓰였다. 빨강과 황금색이 주조를 이루는 오볼렌스키의 의상도 마찬가지였다. 인도식 의상이 사용되었지만 다른 전통에서 온 요소와 혼합된 것이었다. 반복해서 사용되는 막대기들, 다목적으로 쓰이는 대나무 스크린처럼 최소한의 도구만이 이용되었다. 말은 마임으로 묘사되었고 아르주나와 카르나의 중심적 전투에 나오는 전차를 표현하기 위해 그들의 자랑스러운 전사들은 커다란 수레바퀴 하나를 굴렸다. 피에 굶주린 정복자들에 의해 씹어 뱉어진 빨간 리본들로 살해당한 전사들의 창자를 표현했다. 팔에 안긴 아기는 여배우가 재빨리 자기의 베일을 기저귀처럼 다루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여신이 탄 코끼리를 표현하기 위해 일단의 배우들이 자기의 몸을 사용했다. 자기 아들을 죽인 결과 자살을 하게 되는 전사는 그의 머리 위에 피로 채워진 물항아리를 아주 천천히 쏟아 붓게 하는 것으로 나타내졌다. 다른 수많은 장면들에서도 느린 동작이 사용되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은 아르주나가 그의 활과 화살을 가지고 위대한 전사 비쉬마를 향해 겨냥하자 갑자기 정지장면이 되면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는 반신반인 크리쉬나가 화살을 잡아서 느린 동작으로 무대를 가로질러 비쉬마의 가슴까지 갖고 가는 장면이다. 음악은 츠키다리가 이끄는 작은 규모의 앙상블이 무대 위에서 연주하였고 즉흥연주도 많은 효과를 내었다. 연주하는 것은 무대의 3/4반경에 정해졌고 무대배경―오볼렌스키가 제작한―은 바닥에 빨간 흙을 깔고 후미의 벽 앞에 시냇물을 만들고 아랫무대에는 물웅덩이를 만들었다. 바닥에서 각각의 스웨이드를 재배열하는 간단한 방법에 의해 위치가 계속해서 바뀌었다. 흙, 물, 공기. 각각 형이상학적 목적을 바꾸는 의미를 담고 있는 이 요소들을 완성시키기 위해 공연 중에 불을 자주 사용했다. 일단의 전사들을 둘러서서 잡으려 할 때 웅덩이 주변의 흙에서 마술 불꽃이 일어났고 마지막 대화재는 겁을 주는 마그네슘 불길을 내뿜어 표현했다.


『마하바라타』는 호머,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와 성경의 요소들이 들어가 있으며 밀려드는 장엄함의 감동이 느껴지는 코메디, 비극, 스토리텔링 그리고 신비주의가 섞여있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미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18개 국적을 가진 24명의 배우(그리고 2명의 아이들이 출연하였고 이들 중 많은 배우가 여러 역할들을 했다. 해외에서의 비평은 놀랍도록 호의적이었으나 뉴욕에서는 몇몇 비평가들이 황홀한 평을 하긴 했어도 많은 비평들이 우려를 표명했다: 시각적 장대함은 칭찬을 받을 만했으나 너무 감정의 개입을 차단시켜 놓은 점, 수다스러우면서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는 단어들(브룩은 영어로 된 작품을 그렇게 했다), 지나치게 복잡한 이야기와 정신적으로 가볍고 쉬웠다는 점에서 잘못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타임』지의 비평가 윌리엄 헨리 3세가 했던 “장황하고 지루하다느니, 너무 이상하다느니 하는 모든 흠들은 부차적인 것이다. 그 작품은 그 자체로 중요하며 성공적 의미의 경이로 움으로 축복받은 황홀한 신화와 우화의 여행이다”라고 한 것에 동의했을 것이다.


이 평범치 않은 작품은 1985년 9월에 유럽을 잠시 순회했으며 1987년 영어판 작품으로 세계를 순회하여 BAM에서 두 블록 떨어진 「BAM's Majestic Theatre」무대에 섰다. 1904년까지만 해도 우아한 모습이지만 사용하지 않게 되었던 이 극장은 오랫동안 브룩의 작품을 전담하여 공연했던 BAM의 역할을 대신하기 위해 특별히 개축공사를 했다. 5백만 달러가 지출되었는데 이것은 예전의 모습과 비슷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뷔페 뒤 노르에서 느낄 수 있는 얽은 모습에 야만스런 분위기가 나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눈부시게 독창적이었다. 벽은 칠이 몇 겹 벗겨진 느낌을 주도록 긁혀 있었지만 미학적으로 뛰어나도록 조심스럽게 제작된 것이었다. 그리고 뷔페에서 만들어진 것과 닮은 앞무대 구역도 만들었으며 객석구조가 가장 혁신적으로 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