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의 포스트모더니즘 연극 읽기
김 숙 현
1. 이미지(Image)
모더니스트들이 '전통'의 무게와 대량생산이 만든 기계화로부터 강력하게 저항하며 개개인이 그로부터 해방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을 포함한 모든 권력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강조한다. 또한 모더니스트들이 전체 이야기를 주도하는 지배서사(Master-narrtives)와 '재현'의 미학을 극복하기 위해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믿었던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후기산업사회라는 그물망 속에서 새로운 미학과 삶을 탐색한다고 볼 수 있다.
몇몇 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그 개념적 우산의 폭을 좀 더 넓게 내림으로써 아르또, 브레히트, 베케트 등의 예술가들을 제시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연극의 징후들을 엿보곤 한다. (물론 여기엔 모더니즘의 연속이냐, 단절이냐라는 문제가 따르고 있긴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 이론은 중심의 해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거대한 역사와 큰 신화가 존재함으로써 여전히 서로의 '믿음'을 동일시하고 은밀히 구속하는 어떤 의사소통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인간 내면의 보편성이라는 믿음을 지속시켜 통일되고 일관성있는 '의미'를 새김질하고 지배이데올로기를 반추하며 진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배우와 관객간의 중재되지 않은 순수한 만남을 주장하며 관객과의 영적교류를 위한 적극적 만남을 위해 무대를 설정하는 그로토우스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모든 기계매체들의 위협적인 스펙터클에 저항하는 보루로서, 그리고 연극이라는 매체의 본질적인 고유성에 대한 방향모색의 한 통로로서 신성한 배우의 신체를 내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들 이론 역시 억압된 무의식을 해방하고 왜곡된 인간의식을 어루만지려 함으로써 치유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장르와 매체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윌슨의 연극 텍스트는 연극자체의 어떤 순수함과 관계치 않는다. 물론 이미지가 현실을 대치하는 미디어의 통치경향에 대해서 효과적이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윌슨은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사회적 유토피아나 내면의 광기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정신의 분열'이나 '후기산업사회'는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자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윌슨의 연극은 플롯과 캐릭터 '중심'이 아닌 스펙터클에 비중을 둔다. 이는 인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좌절시키려는 방안이기도 하고 '재현'의 폐지와 종말을 말해준다. 이 시대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기에 연극이 더 이상의 '재현극'을 생산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게다가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hyperreal) 이미지들의 권력은 이미 그 원본(original)들의 가치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제 더 이상 진실이나 본질을 드러내는 출발점이 되지 못하며 영상매체는 우리의 환경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재생하여 우리의 감각 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실재(reality)'가 아니라 '이미지'이며, '실재'가 된 '이미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엄청난 이미지의 폭격 속에서 '원본'보다는 '이미지'-(모조물, 복제품)에 더 익숙해 있기에 진짜와 가짜, 내용과 형식, 내부와 외부 그리고 정신과 신체 사이의 차이를 가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사물이 아닌 기호로 교환되는 사회, 기호의 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하는 이 사회(테크놀로지 시뮬레이션)에서는 진정으로 통일된 인간의 자아 뿐 아니라 인간의 광기를 무의식의 작용으로 해석하는 정신분석적 자아도 무의미한 것이다.
윌슨은 본격 모더니스트(high-modernist)들이 신봉해 온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의식, 무의식이 이미 부유하는 이미지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렇기에 하나의 통일된 주체나 자아로 재현될 수 없는 분열된 정신적 이미지를 무수한 이미지들로 전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윌슨의 이미지 연극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연극은 큰 범주에서의 공통된 무의식의 세계나 본질, 역사 등 기성의 믿음체계를 부정하는 한편 파편화된 주체를 유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연극은 결국 분열되고 분산된 자아, 해체된 의미 등을 부유하는 다양한 이미지들로써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무대 위 실제 기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꼴라쥬 기법이라 할 수 있겠다.
2. 움직임이 드러내는 모호한 이미지들
유기체적이고 통합적인 의미를 거부하는 윌슨의 연극은 중심이 없는 무수한 이미지들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주제를 파악하려는 관객의 해석학적 의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관객의 의미해석 의도를 파괴하는 또다른 하나는 배우의 시각 이미지인데 이때 배우의 행위는 하나의 의미로 관통될 수 없는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배우의 움직임에 대해 간략히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다.
배우의 시각 이미지 표출에 있어서 중요 동작들은 느린 동작과 정지동작(부동자세), 그리고 반복동작들이 있다. 이러한 주요동작들을 함축적으로 논할 수 있는 '귀머거리 소년의 응시(Deafman Glance)'의 서막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어둠 속에서 목이 올라온 빅토리아풍의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금이 간 회색벽 앞에서 관객을 등진 채 서 있다. 관객들은 제자리에 앉았고 조명은 어두워졌지만 등을 돌린 거대한 제왕같은 인물은 완전히 정지한 채로 서 있다 ... 극도의 침묵만이 있을 따름이다 ...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는 천천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옆으로 돌아선다 ... 얼굴은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잔잔하고 아름다운 얼굴엔 거의 표정이 없다. 매우 느리게 검정 장갑을 끼고 컵에 우유를 따른다. 아이는 마신다. 다시 테이블로 되돌아 와서 칼을 집어들고 조심스레 천으로 싼다. 그녀는 다시 아이에게로 간다. 그녀는 천천히 그 섬광을 들이댄다 ... 아이는 쓰러지고 다시 한 번 조용히 칼로 아이를 미끄러지듯 반복해서 찌른다."
서막의 살인장면은 여러번 반복하여 이뤄지며 이 장면을 완성하는 데는 꼬박 한시간이 걸린다. 또한 서막의 첫 장면은 이 공연의 끝 장면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이렇게 느리고 반복된 움직임은 이후 작품들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한 여배우가 컵을 입술까지 들어올리는 것과 같은 단순동작을 하는데는 한시간 반이 걸리고 거대한 종이거북이가 무대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데에는 한시간이 경과한다. 이에 대해 윌슨은 "사람들은 느린 동작에 대해 말하곤 한다 ...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느린 동작이 아니라 자연스런 시간인 것이다. 대부분 연극은 빠른 시간을 다루지만 나는 태양이 지는데 걸리는 시간, 구름이 변화하고 날이 새는데 걸리는 시간 등 그러한 자연스런 시간을 다룬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경험해 온 기존의 극적인 시간개념, 즉 한사람의 일생을 짧은 시간 내에 압축시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극적 시간개념으로서는 윌슨 공연의 느린 동작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인 것이다. 더군다나 느린 동작은 각 부분마다의 템포를 지니게 되어 속도를 달리할 수 있었는데 '검정장갑을 느리게 끼고 우유를 따라서 빠르게 아이에게 준다. 마침내 살인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가장 느린 것이다.'라는 서막의 흑인 여배우 셔튼의 진술에서처럼 느리고 빠른 움직임의 대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이 지각할 수 있는 판단력을 잃게 한다. 다시 말해서 관객에겐 시계가 멈추어 버린 것과 같아서 그 단순하고도 긴 움직임에 대해 무엇이 느리고 빠른지 판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막에서 '여자'의 살인행위는 그 자체로 관객의 통상적인 기대와 어긋날 뿐 아니라 '여자'의 느린 동작과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모호한 이미지로 인해 관객은 서로간에 공통된 의미로서 이미지를 규정할 수 없는 다의미성을 보장받는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스테판 브레히트('비젼의 연극'의 저자)는 그의 글에서 '살해장면의 느린 동작에서 나타난 어머니(즉 칼을 쥐고 살인을 행한 여자)라는 의미가 일상적으로 관객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사건으로 드러남으로써 갈등을 일으킨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로렌스 샤이어는 그의 책에서 '편안이라는 우유와 공포라는 칼'로 어머니라는 존재의 양면적 권력을 기술하고 있다. 그 반복되는 살해장면과 여자의 움직이는 속도가 주는 모호성과 한편으론 열려있는 의미의 다양성들에 대해 여배우 셔튼은 함축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물은 많은 문화적 경계와 시대를 가로지른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말하기란 어렵다. 때론 한 어머니라 말하기조차 어렵다. 그녀는 제의적 인물이다. 또한 사제일지도 모른다. - 검은 드레스와 위엄있는 자태, 그리고 희색의 작은 칼라. 거기엔 많은 역설이 있다. 왜냐하면 무대는 제의적이고 살인자는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본 것을 규정하거나 윤곽을 잡기란 어렵다. 그것은 풍요롭도록 하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느린 움직임과 함께 배우의 가장 단순한 행위로 드러난 한 인물의 이미지는 결코 일관된 어떤 의미를 띨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다양성을 띠게 되며 다성적인 의미들을 보장해 주게 되는 것이다.
윌슨은 배우들로 하여금 미니멀한 움직임을 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무대 가로질러 걷기, 서 있기, 앉아있기, 일어서기, 앉기, 눕기, 퇴장하기와 같은 단순동작들이다. 단순한 움직임들은 윌슨의 배우로 하여금 정신과 신체에너지를 고양시켜 역에 빠져 들거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을 반대하며 전통적인 연기기술을 제거토록 유도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일상적인 움직임들이라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배우가 밧줄에 매달려 있다든지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는다든지 혹은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동작 등의 비일상적인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조적인 움직임을 통해 윌슨은 아름다운 로맨틱 이미지에 저항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대그림은 더욱더 시각적 이미지의 모호성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다의미성을 갖게 해준다.
일상적인 동작과 비일상적인 동작의 대조, 느린 움직임과 빠른 움직임의 대조, 미니멀한 움직임과 대조적인 맥시멀한 다초점의 꼴라쥬 무대(화려한 무대효과와 대조되는 가장 단순한 행위와 몸짓들), 이 모든 대조는 관계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며 결국 그 많은 이미지의 모호성과 대조들로 인해 관객은 공유된 공통의 실체로서 의미를 규정할 수 없게 된다.
3. 시공간의 상대성
그렇다면 윌슨연극의 기반이 되고있는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윌슨 연극의 모든 배경들을 명쾌히 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사무실 창문으로 어떤 동시대 건물을 본다. 그 옆에 18세기 건물이 있고 저쪽에는 건축 중인 건물이 있다. 나는 현재의 파리식 건물 뿐 아니라 그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징후까지도 본다. 이 모든 사건들은 동시적이지만 상이한 속도로 일어난다 ... 그 공간은 시간으로 가득 찬 어떤 공간이다. 나는 영원한 초시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들이 차지하고 있는 어떤 공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윌슨의 시공간 개념을 엿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진술은 상대성 원리가 그의 극의 기반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느린 동작과 빠른 움직임의 혼융이라는 각 행위의 속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부터 주체와 대상이라는 관계의 상대성, 그리고 미적 판단에 있어서의 상대주의에까지 영역을 넓혀가면서 윌슨 공연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이를테면 운동은 서로에 대한 상대속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같은 속도로 운동하는 두 물체는 서로에게 멈추어 있는 듯이 보이며 서로의 시간은 같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두 물체를 보게되며 경험하는 시간은 그들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란 다르게 흐르고 있으며, 또한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은 느려지고 우리가 보는 현재는 각 사건의 과거 모습일 따름이며 개인적 인식일 뿐 공유할 수 없다는 상대적 현재가 바로 윌슨이 갖는 사상적 배경이다. 말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함께 있는 그것이 바로 윌슨의 시공간 개념인 것이다. 그것은 역사성과 시간성이 퇴조하고 공간적 논리가 득세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연극을 '중심이 없는 층에 층을 이룬 양파'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실제로 한 공연에서 여배우가 주전자를 들고 잔이 넘치도록 은빛의 물줄기를 계속 따르는 장면이 있다. 또다른 장면에서는 배우가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양파껍질을 벗기고 있다. 이들 장면에서 배우는 존재(presence)와 부재(absence)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신체는 지속되는 행위 자체를 제외하고는 절대적으로 정지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의 움직임은 '행위' -양파를 벗기는, 물을 따르는- 자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물은 그 자신의 힘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양파는 자신을 벗기도록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관계에서 대상이 주체를 바라보는 관계, 그리고 주체가 그 대상을 초월하여 그 자체가 되는 것으로 변화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배우는 모방하는 연기자도 아니고 행위의 제시자도 아닌, 자아를 배제하는 행위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배우의 신체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면서 역설적으로 '신체'라는 물질 덩어리를 전시하게 된다.
윌슨에게 시간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자아를 배제한 행위 자체가 된 배우는 관객의 눈 앞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게 된다. 이제 배우는 무대의 중심요소라기보다 시각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제요소들 속에서 '존재'와 '부재'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생성(changing)'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기계가 된다.
4. 포스트모던 '주체'
윌슨의 연극에서는 스페인왕, 스탈린, 빅토리아 여왕, 아인슈타인, 헤쓰, 에디슨과 링컨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이 인물들은 이미 연극의 제목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일견, 이 인물들(제재)은 주제를 뚜렷이 하는 명백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개개의 공연은 이 인물들과 연계하여 발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도 않는다. 윌슨의 인물들은 역사나 신화로부터 취해오지만 결코 거기에 과거의 의미란 없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드, 스탈린,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화적 인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연극에서 우리는 특정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관객은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떤 이야기를 갖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유된 정보에 입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이야기가 없어도 어떤 연극적 이벤트를 창조할 수 있다...예술가는 역사가가 아니라 시인처럼 역사를 재창조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시대가 공유한 다양한 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공공의 생각과 연상들을 취하고 유희하며 그 틀에 기반하여 어떤 색다른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윌슨의 진술에서 인물이나 이야기가 역사적인 구체성, 필연성과는 무관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윌슨은 이러한 인물의 이미지와 제재들을 자의적으로 채택하고 결합했는데 이를테면 '스페인왕'이라는 작품은 '지그문드 프로이드의 생애'의 두번째 막으로 통합되었고 '프로이드의 생애'는 '귀머거리 소년의 응시'로 합해진 것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이렇게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작품의 통합과 역사적인 맥락과 거리를 두고 취해진 등장인물들은 윌슨의 극이 궁극적인 내용이나 역사적 의미를 연관시키지 않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윌슨은 자기 작품 속에서 이미 사용했던 인물의 이미지를 다음 작품에 시각적으로 인용을 하곤 한다. 일례로 '귀머거리 소년의 응시'에서 빅토리아풍 드레스는 그 이후 작품에서 자주 이용된다. 무대 오브제 역시 역사성을 무시하고 등장하게 되는데 '나무같은 링컨', '빙산같은 프레드릭 대제'는 그러한 구체적인 예들이다. 그러니까 '시민전쟁(Civil Wars)'에서 링컨이라는 인물은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크기를 거대하게 늘린 나무와 같이 혹은 페니스와 같이 탈인격화된 표상이 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윌슨이 공연했던 독일인 극작가 하이너 뮐러의 텍스트 '햄릿 머쉰'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텍스트에는 이미 등장인물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똑같은 말꼬리를 붙임으로써 계획된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햄릿 역을 맡은 배우가 제1막에서 '나는 햄릿이었네'로 말한다. 그러나 2막에서는 '나는 오필리어이다' 그리고 3막에서 햄릿은 '나는 여자이길 원하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4막에서는 '나는 맥베드였네' 그리고 5막에서는 '여기 엘렉트라가 말하노라'라고 말한다. 이는 배우의 대사와 등장인물 간에 불일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배우의 이러한 말은 화자의 '비결정성'을 함축하고 있는 대사이며 더불어 '햄릿'과 '맥베드'라는 텍스트 간의 호환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햄릿이라는 인물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대사들은 분열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텍스트내 화자의 비결정성은 윌슨의 극에 있어 자세나 위치 속에서 이미지를 드러내는 배우로 한걸음 나아감을 볼 수 있다.
즉 윌슨의 '햄릿 머쉰' 공연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햄릿'이나 '오필리어'같은 등장인물들은 없는 것이다. 더우기 '햄릿이라는 연기자'로 제시되는 반-캐릭터(anti-character)들도 없다. 배우는 단지 '회전의자 위의 여자' 혹은 '나무 위에 기대는 여자', '벽 위를 응시하는 남자' 등으로 자세나 위치에 의해 동일시되는 다목적 연기자인 것이다. 배우들은 그들 스스로가 극 전체의 의미체계에 그들의 몸짓을 종속시키지 않으며 등장인물은 어떠한 상징성도 띠지 않는 '머리빗는 여자', '웃음짓는 여자' 등의 이미지 자체로서만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배우는 의미로서 몸짓을 행하지 않으며 몸짓으로서 몸짓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퍼스낼러티는 해체되거나 부재하게 되는 것이다.
윌슨은 등장인물이 갖는 고정된 의미를 회피하고자 했으며 배우 역시 역할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하거나 역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길 원했다. 그러한 장치 중에 하나가 바로 이름없는 등장인물, 번호로 표시되는 등장인물이다. (예; 벤치 위 남자1,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4 등) 또한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 언어, 구두점 없는 말, 틀린 철자, 잘못된 문법 등은 객관화, 관통선을 유지하려는 배우의 시도를 파괴한다. 그렇기에 윌슨은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맡은 역할에 대해 정체성, 동기화, 정당화, 내적 삶을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인물의 고정성을 회피하고 아울러 극의 박진감을 느슨하게 하는 또다른 전략은 더블 캐스팅이다. 즉 이러한 방법들은 배우가 배역에 대해 배우마다의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는 것을 가능케 하고 또한 배우 자신의 여러 자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인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처럼 그의 연극은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포스트모던 주체를 수행하는 것이다. 더블 캐스팅에 대해 윌슨은 '그것은 똑같은 것을 보는 두개의 다른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관계의 상대성! 윌슨의 배우는 그 자체가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론이며 새로운 텍스트 읽기임에 틀림없다.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의 포스트모더니즘 연극 읽기
김 숙 현
1. 이미지(Image)
모더니스트들이 '전통'의 무게와 대량생산이 만든 기계화로부터 강력하게 저항하며 개개인이 그로부터 해방되도록 노력하고 있다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더니즘을 포함한 모든 권력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강조한다. 또한 모더니스트들이 전체 이야기를 주도하는 지배서사(Master-narrtives)와 '재현'의 미학을 극복하기 위해 궁극적인 유토피아를 믿었던 반면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그리고 후기산업사회라는 그물망 속에서 새로운 미학과 삶을 탐색한다고 볼 수 있다.
몇몇 글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그 개념적 우산의 폭을 좀 더 넓게 내림으로써 아르또, 브레히트, 베케트 등의 예술가들을 제시하여 포스트모더니즘 연극의 징후들을 엿보곤 한다. (물론 여기엔 모더니즘의 연속이냐, 단절이냐라는 문제가 따르고 있긴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 이론은 중심의 해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긍정적이라 할지라도 거대한 역사와 큰 신화가 존재함으로써 여전히 서로의 '믿음'을 동일시하고 은밀히 구속하는 어떤 의사소통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인간 내면의 보편성이라는 믿음을 지속시켜 통일되고 일관성있는 '의미'를 새김질하고 지배이데올로기를 반추하며 진보라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배우와 관객간의 중재되지 않은 순수한 만남을 주장하며 관객과의 영적교류를 위한 적극적 만남을 위해 무대를 설정하는 그로토우스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는 모든 기계매체들의 위협적인 스펙터클에 저항하는 보루로서, 그리고 연극이라는 매체의 본질적인 고유성에 대한 방향모색의 한 통로로서 신성한 배우의 신체를 내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들 이론 역시 억압된 무의식을 해방하고 왜곡된 인간의식을 어루만지려 함으로써 치유책을 제시하고자 한다.
그러나 장르와 매체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윌슨의 연극 텍스트는 연극자체의 어떤 순수함과 관계치 않는다. 물론 이미지가 현실을 대치하는 미디어의 통치경향에 대해서 효과적이고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윌슨은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들과는 달리 사회적 유토피아나 내면의 광기를 전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정신의 분열'이나 '후기산업사회'는 교정의 대상이 아니라 그의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소중한 자원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윌슨의 연극은 플롯과 캐릭터 '중심'이 아닌 스펙터클에 비중을 둔다. 이는 인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좌절시키려는 방안이기도 하고 '재현'의 폐지와 종말을 말해준다. 이 시대에는 너무나 많은 이야기와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기에 연극이 더 이상의 '재현극'을 생산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다. 게다가 '사실보다 더 사실같은'(hyperreal) 이미지들의 권력은 이미 그 원본(original)들의 가치를 넘어선지 오래다. 이제 더 이상 진실이나 본질을 드러내는 출발점이 되지 못하며 영상매체는 우리의 환경을 너무나도 생생하게 재생하여 우리의 감각 뿐만 아니라 무의식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실재(reality)'가 아니라 '이미지'이며, '실재'가 된 '이미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한 엄청난 이미지의 폭격 속에서 '원본'보다는 '이미지'-(모조물, 복제품)에 더 익숙해 있기에 진짜와 가짜, 내용과 형식, 내부와 외부 그리고 정신과 신체 사이의 차이를 가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결국 사물이 아닌 기호로 교환되는 사회, 기호의 이미지가 실재를 압도하는 이 사회(테크놀로지 시뮬레이션)에서는 진정으로 통일된 인간의 자아 뿐 아니라 인간의 광기를 무의식의 작용으로 해석하는 정신분석적 자아도 무의미한 것이다.
윌슨은 본격 모더니스트(high-modernist)들이 신봉해 온 상상력을 바탕으로 인간의 의식, 무의식이 이미 부유하는 이미지에 길들여져 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렇기에 하나의 통일된 주체나 자아로 재현될 수 없는 분열된 정신적 이미지를 무수한 이미지들로 전경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윌슨의 이미지 연극은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과 동일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의 연극은 큰 범주에서의 공통된 무의식의 세계나 본질, 역사 등 기성의 믿음체계를 부정하는 한편 파편화된 주체를 유희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연극은 결국 분열되고 분산된 자아, 해체된 의미 등을 부유하는 다양한 이미지들로써 보여주고자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무대 위 실제 기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꼴라쥬 기법이라 할 수 있겠다.
2. 움직임이 드러내는 모호한 이미지들
유기체적이고 통합적인 의미를 거부하는 윌슨의 연극은 중심이 없는 무수한 이미지들을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주제를 파악하려는 관객의 해석학적 의도를 불가능하게 한다. 관객의 의미해석 의도를 파괴하는 또다른 하나는 배우의 시각 이미지인데 이때 배우의 행위는 하나의 의미로 관통될 수 없는 다중적이고 다층적인 이미지로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시각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배우의 움직임에 대해 간략히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다.
배우의 시각 이미지 표출에 있어서 중요 동작들은 느린 동작과 정지동작(부동자세), 그리고 반복동작들이 있다. 이러한 주요동작들을 함축적으로 논할 수 있는 '귀머거리 소년의 응시(Deafman Glance)'의 서막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어둠 속에서 목이 올라온 빅토리아풍의 드레스를 입은 한 여자가 금이 간 회색벽 앞에서 관객을 등진 채 서 있다. 관객들은 제자리에 앉았고 조명은 어두워졌지만 등을 돌린 거대한 제왕같은 인물은 완전히 정지한 채로 서 있다 ... 극도의 침묵만이 있을 따름이다 ... 많은 시간이 흘렀을 때 그녀는 천천히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옆으로 돌아선다 ... 얼굴은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잔잔하고 아름다운 얼굴엔 거의 표정이 없다. 매우 느리게 검정 장갑을 끼고 컵에 우유를 따른다. 아이는 마신다. 다시 테이블로 되돌아 와서 칼을 집어들고 조심스레 천으로 싼다. 그녀는 다시 아이에게로 간다. 그녀는 천천히 그 섬광을 들이댄다 ... 아이는 쓰러지고 다시 한 번 조용히 칼로 아이를 미끄러지듯 반복해서 찌른다."
서막의 살인장면은 여러번 반복하여 이뤄지며 이 장면을 완성하는 데는 꼬박 한시간이 걸린다. 또한 서막의 첫 장면은 이 공연의 끝 장면에서 다시 되풀이된다. 이렇게 느리고 반복된 움직임은 이후 작품들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한 여배우가 컵을 입술까지 들어올리는 것과 같은 단순동작을 하는데는 한시간 반이 걸리고 거대한 종이거북이가 무대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데에는 한시간이 경과한다. 이에 대해 윌슨은 "사람들은 느린 동작에 대해 말하곤 한다 ...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느린 동작이 아니라 자연스런 시간인 것이다. 대부분 연극은 빠른 시간을 다루지만 나는 태양이 지는데 걸리는 시간, 구름이 변화하고 날이 새는데 걸리는 시간 등 그러한 자연스런 시간을 다룬다."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경험해 온 기존의 극적인 시간개념, 즉 한사람의 일생을 짧은 시간 내에 압축시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극적 시간개념으로서는 윌슨 공연의 느린 동작은 이해할 수 없는 충격인 것이다. 더군다나 느린 동작은 각 부분마다의 템포를 지니게 되어 속도를 달리할 수 있었는데 '검정장갑을 느리게 끼고 우유를 따라서 빠르게 아이에게 준다. 마침내 살인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가장 느린 것이다.'라는 서막의 흑인 여배우 셔튼의 진술에서처럼 느리고 빠른 움직임의 대조는 관객으로 하여금 뚜렷이 지각할 수 있는 판단력을 잃게 한다. 다시 말해서 관객에겐 시계가 멈추어 버린 것과 같아서 그 단순하고도 긴 움직임에 대해 무엇이 느리고 빠른지 판단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막에서 '여자'의 살인행위는 그 자체로 관객의 통상적인 기대와 어긋날 뿐 아니라 '여자'의 느린 동작과 반복을 통해 드러나는 모호한 이미지로 인해 관객은 서로간에 공통된 의미로서 이미지를 규정할 수 없는 다의미성을 보장받는다. 이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스테판 브레히트('비젼의 연극'의 저자)는 그의 글에서 '살해장면의 느린 동작에서 나타난 어머니(즉 칼을 쥐고 살인을 행한 여자)라는 의미가 일상적으로 관객이 기대했던 것과 다른 사건으로 드러남으로써 갈등을 일으킨다.'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로렌스 샤이어는 그의 책에서 '편안이라는 우유와 공포라는 칼'로 어머니라는 존재의 양면적 권력을 기술하고 있다. 그 반복되는 살해장면과 여자의 움직이는 속도가 주는 모호성과 한편으론 열려있는 의미의 다양성들에 대해 여배우 셔튼은 함축적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물은 많은 문화적 경계와 시대를 가로지른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말하기란 어렵다. 때론 한 어머니라 말하기조차 어렵다. 그녀는 제의적 인물이다. 또한 사제일지도 모른다. - 검은 드레스와 위엄있는 자태, 그리고 희색의 작은 칼라. 거기엔 많은 역설이 있다. 왜냐하면 무대는 제의적이고 살인자는 종교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본 것을 규정하거나 윤곽을 잡기란 어렵다. 그것은 풍요롭도록 하는 어떤 것이다."
이렇게 느린 움직임과 함께 배우의 가장 단순한 행위로 드러난 한 인물의 이미지는 결코 일관된 어떤 의미를 띨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이미지는 다양성을 띠게 되며 다성적인 의미들을 보장해 주게 되는 것이다.
윌슨은 배우들로 하여금 미니멀한 움직임을 하도록 한다. 이를테면 무대 가로질러 걷기, 서 있기, 앉아있기, 일어서기, 앉기, 눕기, 퇴장하기와 같은 단순동작들이다. 단순한 움직임들은 윌슨의 배우로 하여금 정신과 신체에너지를 고양시켜 역에 빠져 들거나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을 반대하며 전통적인 연기기술을 제거토록 유도한다. 이러한 움직임들이 일상적인 움직임들이라면 이와는 대조적으로 배우가 밧줄에 매달려 있다든지 사다리 위에서 균형을 잡는다든지 혹은 밧줄을 타고 내려오는 동작 등의 비일상적인 움직임들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조적인 움직임을 통해 윌슨은 아름다운 로맨틱 이미지에 저항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무대그림은 더욱더 시각적 이미지의 모호성을 증폭시키고 결과적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다의미성을 갖게 해준다.
일상적인 동작과 비일상적인 동작의 대조, 느린 움직임과 빠른 움직임의 대조, 미니멀한 움직임과 대조적인 맥시멀한 다초점의 꼴라쥬 무대(화려한 무대효과와 대조되는 가장 단순한 행위와 몸짓들), 이 모든 대조는 관계의 상대성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며 결국 그 많은 이미지의 모호성과 대조들로 인해 관객은 공유된 공통의 실체로서 의미를 규정할 수 없게 된다.
3. 시공간의 상대성
그렇다면 윌슨연극의 기반이 되고있는 기본 원리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이 윌슨 연극의 모든 배경들을 명쾌히 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나는 지금 사무실 창문으로 어떤 동시대 건물을 본다. 그 옆에 18세기 건물이 있고 저쪽에는 건축 중인 건물이 있다. 나는 현재의 파리식 건물 뿐 아니라 그 과거의 흔적과 미래의 징후까지도 본다. 이 모든 사건들은 동시적이지만 상이한 속도로 일어난다 ... 그 공간은 시간으로 가득 찬 어떤 공간이다. 나는 영원한 초시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들이 차지하고 있는 어떤 공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윌슨의 시공간 개념을 엿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진술은 상대성 원리가 그의 극의 기반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말은 느린 동작과 빠른 움직임의 혼융이라는 각 행위의 속도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에서부터 주체와 대상이라는 관계의 상대성, 그리고 미적 판단에 있어서의 상대주의에까지 영역을 넓혀가면서 윌슨 공연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 충분하리라 여겨진다. 이를테면 운동은 서로에 대한 상대속도로 나타나기 때문에 같은 속도로 운동하는 두 물체는 서로에게 멈추어 있는 듯이 보이며 서로의 시간은 같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우리는 엄청난 속도로 이동하는 두 물체를 보게되며 경험하는 시간은 그들과 다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시간이란 다르게 흐르고 있으며, 또한 중력이 강한 곳에서 시간은 느려지고 우리가 보는 현재는 각 사건의 과거 모습일 따름이며 개인적 인식일 뿐 공유할 수 없다는 상대적 현재가 바로 윌슨이 갖는 사상적 배경이다. 말하자면 과거, 현재, 미래가 선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현재 속에 함께 있는 그것이 바로 윌슨의 시공간 개념인 것이다. 그것은 역사성과 시간성이 퇴조하고 공간적 논리가 득세함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연극을 '중심이 없는 층에 층을 이룬 양파'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 일 것이다. 실제로 한 공연에서 여배우가 주전자를 들고 잔이 넘치도록 은빛의 물줄기를 계속 따르는 장면이 있다. 또다른 장면에서는 배우가 아주 천천히 오랫동안 양파껍질을 벗기고 있다. 이들 장면에서 배우는 존재(presence)와 부재(absence)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녀의 신체는 지속되는 행위 자체를 제외하고는 절대적으로 정지 상태이고 그 상태에서의 움직임은 '행위' -양파를 벗기는, 물을 따르는- 자체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물은 그 자신의 힘으로 흐르고 있었으며 양파는 자신을 벗기도록 그녀를 이용하고 있는 것과 같다. 여기서 우리는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주체가 대상을 바라보는 관계에서 대상이 주체를 바라보는 관계, 그리고 주체가 그 대상을 초월하여 그 자체가 되는 것으로 변화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즉 배우는 모방하는 연기자도 아니고 행위의 제시자도 아닌, 자아를 배제하는 행위 자체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배우의 신체는 하나의 예술작품이면서 역설적으로 '신체'라는 물질 덩어리를 전시하게 된다.
윌슨에게 시간은 정체된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개념이다. 자아를 배제한 행위 자체가 된 배우는 관객의 눈 앞에 '존재'하지만 동시에 '부재'함으로써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게 된다. 이제 배우는 무대의 중심요소라기보다 시각적 이미지를 구축하는 제요소들 속에서 '존재'와 '부재'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는 '생성(changing)'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는 기계가 된다.
4. 포스트모던 '주체'
윌슨의 연극에서는 스페인왕, 스탈린, 빅토리아 여왕, 아인슈타인, 헤쓰, 에디슨과 링컨 등의 인물이 등장한다.(이 인물들은 이미 연극의 제목에 포함되어 있기도 하다) 일견, 이 인물들(제재)은 주제를 뚜렷이 하는 명백성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지만 개개의 공연은 이 인물들과 연계하여 발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도 않는다. 윌슨의 인물들은 역사나 신화로부터 취해오지만 결코 거기에 과거의 의미란 없기 때문이다.
"나는 프로이드, 스탈린, 빅토리아 여왕, 그리고 아인슈타인이 우리 시대의 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화적 인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들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연극에서 우리는 특정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관객은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 어떤 이야기를 갖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유된 정보에 입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특정한 이야기가 없어도 어떤 연극적 이벤트를 창조할 수 있다...예술가는 역사가가 아니라 시인처럼 역사를 재창조한다. 예술가는 자신의 시대가 공유한 다양한 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공공의 생각과 연상들을 취하고 유희하며 그 틀에 기반하여 어떤 색다른 이야기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윌슨의 진술에서 인물이나 이야기가 역사적인 구체성, 필연성과는 무관하게 드러남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윌슨은 이러한 인물의 이미지와 제재들을 자의적으로 채택하고 결합했는데 이를테면 '스페인왕'이라는 작품은 '지그문드 프로이드의 생애'의 두번째 막으로 통합되었고 '프로이드의 생애'는 '귀머거리 소년의 응시'로 합해진 것이 그러한 예에 해당한다. 이렇게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작품의 통합과 역사적인 맥락과 거리를 두고 취해진 등장인물들은 윌슨의 극이 궁극적인 내용이나 역사적 의미를 연관시키지 않음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또한 윌슨은 자기 작품 속에서 이미 사용했던 인물의 이미지를 다음 작품에 시각적으로 인용을 하곤 한다. 일례로 '귀머거리 소년의 응시'에서 빅토리아풍 드레스는 그 이후 작품에서 자주 이용된다. 무대 오브제 역시 역사성을 무시하고 등장하게 되는데 '나무같은 링컨', '빙산같은 프레드릭 대제'는 그러한 구체적인 예들이다. 그러니까 '시민전쟁(Civil Wars)'에서 링컨이라는 인물은 미국 민주주의의 상징적 인물로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크기를 거대하게 늘린 나무와 같이 혹은 페니스와 같이 탈인격화된 표상이 되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윌슨이 공연했던 독일인 극작가 하이너 뮐러의 텍스트 '햄릿 머쉰'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 텍스트에는 이미 등장인물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고 있다. 그것은 이를테면 똑같은 말꼬리를 붙임으로써 계획된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하는 것이다. 햄릿 역을 맡은 배우가 제1막에서 '나는 햄릿이었네'로 말한다. 그러나 2막에서는 '나는 오필리어이다' 그리고 3막에서 햄릿은 '나는 여자이길 원하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4막에서는 '나는 맥베드였네' 그리고 5막에서는 '여기 엘렉트라가 말하노라'라고 말한다. 이는 배우의 대사와 등장인물 간에 불일치를 잘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배우의 이러한 말은 화자의 '비결정성'을 함축하고 있는 대사이며 더불어 '햄릿'과 '맥베드'라는 텍스트 간의 호환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햄릿이라는 인물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이러한 대사들은 분열된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언급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텍스트내 화자의 비결정성은 윌슨의 극에 있어 자세나 위치 속에서 이미지를 드러내는 배우로 한걸음 나아감을 볼 수 있다.
즉 윌슨의 '햄릿 머쉰' 공연에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햄릿'이나 '오필리어'같은 등장인물들은 없는 것이다. 더우기 '햄릿이라는 연기자'로 제시되는 반-캐릭터(anti-character)들도 없다. 배우는 단지 '회전의자 위의 여자' 혹은 '나무 위에 기대는 여자', '벽 위를 응시하는 남자' 등으로 자세나 위치에 의해 동일시되는 다목적 연기자인 것이다. 배우들은 그들 스스로가 극 전체의 의미체계에 그들의 몸짓을 종속시키지 않으며 등장인물은 어떠한 상징성도 띠지 않는 '머리빗는 여자', '웃음짓는 여자' 등의 이미지 자체로서만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배우는 의미로서 몸짓을 행하지 않으며 몸짓으로서 몸짓을 행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퍼스낼러티는 해체되거나 부재하게 되는 것이다.
윌슨은 등장인물이 갖는 고정된 의미를 회피하고자 했으며 배우 역시 역할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하거나 역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길 원했다. 그러한 장치 중에 하나가 바로 이름없는 등장인물, 번호로 표시되는 등장인물이다. (예; 벤치 위 남자1, 흰 드레스를 입은 여자4 등) 또한 의미가 연결되지 않는 언어, 구두점 없는 말, 틀린 철자, 잘못된 문법 등은 객관화, 관통선을 유지하려는 배우의 시도를 파괴한다. 그렇기에 윌슨은 연출가로서 배우들이 맡은 역할에 대해 정체성, 동기화, 정당화, 내적 삶을 줄 것인가에 대해 염려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인물의 고정성을 회피하고 아울러 극의 박진감을 느슨하게 하는 또다른 전략은 더블 캐스팅이다. 즉 이러한 방법들은 배우가 배역에 대해 배우마다의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 나가는 것을 가능케 하고 또한 배우 자신의 여러 자아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여 인물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처럼 그의 연극은 다층적이고 다중적인 포스트모던 주체를 수행하는 것이다. 더블 캐스팅에 대해 윌슨은 '그것은 똑같은 것을 보는 두개의 다른 방법이다'라고 말한다. 관계의 상대성! 윌슨의 배우는 그 자체가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론이며 새로운 텍스트 읽기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