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시에서 합격하고 싶다면 '제시대사'를 준비해라.

1. 배우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꼭 겪어야 하는 과정 중에 하나가 오디션이다. 유명한 작품에 캐스팅되기 위한 오디션만이 오디션이 아니다. 연기를 배우기 위해 처음 찾아간 학원에서 받았던 간단한 테스트나, 연극영화과 진학을 위해 치러야 하는 실기시험도 모두 오디션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배우라 하더라도 배역을 위해서는 오디션이 필수적이다. 길거리에서 캐스팅이 되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배우도 아마 면접이나 테스트란 명분의 오디션 과정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피할 수 없는 관문을 성공적으로 통과해서 배우의 길로 진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한 사람이 배역을 얻기 위해서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낙방과 거절을 경험해야하니 말이다.


배우를 꿈꾸는 사람들이 어느 날 유명한 스타가 되거나, 이름난 연출가와 각별한 친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연기를 위한 오디션은 평생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이들 중 대부분은 오디션을 위한 연기를 어떻게 준비해야할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무엇을 준비해야하는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다. 심사위원이 “준비해온 거 있으면 보여 주세요”라고 말할 때를 대비해 ‘자유연기’나 ‘특기’를 준비해야한다는 것쯤은 이제 아역배우들도 다 알고 있다. 자유연기는 어떤 독백을 해야 좋은지, 특기는 무엇을 해야 할지도 잘 알고 있다. 심지어는 심사위원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이나 정보를 모아서 그들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되는 연기를 만들기 위해 시간을 낭비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오디션 현장에서 주어지는 ‘제시대사’를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가 않다. 



2. 오디션에서 대본을 가지고 하는 연기를 편의상 ‘오디션 연기’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배우가 미리 준비한 독백을 연기하는 ‘자유연기’고, 또 다른 하나는 현장에서 주어지는 대본을 연기하는 ‘제시대사’다. ‘자유연기’는 흔히 ‘독백연기’를 말하는 것으로 영화나 연극, 드라마, 소설 등의 작품에서 자기가 원하는 장면(scene)을 작품으로 만들어서 연기하면 된다. ‘즉흥대사’는 쉽게 말하면 주어진 대사를 ‘리딩(reading)’하는 것이다. 그래서 ‘화술’ 또는 ‘낭송’이라고도 한다. 보통은 10~20분 정도의 준비시간이 주어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오디션을 보기 바로 직전에 대사를 받는 경우도 있다. 이런 성격 때문에 ‘당일대사’ 혹은 ‘제시대사’라고 하기도 한다. 간혹 어떤 오디션에서는 ‘즉흥연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 이것은 대사 대신 특정한 상황을 제시해주는 ‘상황극’이나 ‘즉흥극’과 혼란의 우려가 있다. 하지만 이런 표현들은 모두 제시대사가 가진 즉흥성과 현장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최근에는 동영상 프로필이나 UCC를 통한 다양한 형태의 오디션이 생겼지만, 전통적인 오디션에서는 여전히 제시대사를 연기하는 능력이 배우를 평가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 실제로 연극영화과 입시나 방송국의 탤런트 시험 같은 실기시험에서도 제시대사는 필수적인 시험과목 중에 하나다. 자유연기나 특기를 안보는 실기시험은 있어도 제시대사를 안보는 시험은 거의 없다. 현장에서 진행되는 오디션도 마찬가지다. 제시대사를 주지 않는 오디션은 경험하기 힘들다. 연극,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작품의 분야를 망론하고 제시대사는 주어진다. 심지어 작품의 미팅을 위해 연출가나 PD를 만나러 나간 커피전문점에서도 그들은 불쑥 대사를 내민다. 때문에 제시대사에 대한 준비없이 오디션을 본다는 것은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기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3. 배우들이 제시대사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제시대사만을 체계적으로 알려주는 곳도 없고 그런 수업도 없다. 내가 연극영화과에서 박사과정까지 학교를 다녔지만 한 번도 제시대사에 대한 수업이나 훈련을 받아 본적은 없다. 다른 학교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즉흥연기’에 대한 수업은 여러 학교에 개설되어 있지만 제시대사는 그렇지 않다. 이것은 비단 대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여러 대학과 학원에서 강의를 했지만 제시대사에 대한 수업을 제대로 하는 학원은 아직 보지 못했다.


또 다른 이유는 제시대사에 대한 배우들의 선입견 때문이다. 배우들은 제시대사가 준비한다고 해서 달라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대사가 어디서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대사 몇 개를 연습한다고 해서 달라질게 없다는 것이다. 연습한 대사가 똑같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답답한 마음에 혼자서 연습을 해봐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도 없다. 배우들의 생각에 제시대사는 그냥 평소 실력으로 할 수 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4. 오디션의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 제시대사란 산을 넘어야 한다. 그런데 왜 다들 산 중턱에 앉아 나를 꼭 빼닮은 대사가 나오기만 바라고 있는 것일까? 사실, 배우들이 제시대사의 중요성에 대해 모르거나 고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고민한다고 해도 뾰족한 대책이 없기 때문에 그냥 주저앉아 있는 것이다.


제시대사를 잘한다고 해서 오디션에서 캐스팅을 보장받거나 시험에서 합격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합격의 조건은 너무 상대적이기 때문에 아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더구나 오디션은 아무리 객관적인 기준을 적용한다고 해도 어차피 주관적인 평가의 과정이기 때문에 실력이 비슷하다면 호감가는 사람이 합격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연기를 지도하면서 좋은 재능을 가지고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배우들을 많이 보았다. 알맞은 때에 알맞은 곳에 있어야 하는 행운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서도 운이 좋아야 한다. 세상에는 재능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찾아올 행운을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행운은 준비가 기회를 만났을 때 찾아오는 것이다.